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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Apr 29. 2024

너드학개론

레코드 혹은 바이닐 혹은 LP, 특히 째즈라는 장르에 푸욱 빠지고 나서부터 유튜브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난 지 어언 300 하고도 10일이 지났다(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렇다). 현재 내 귀를 녹여주는 Work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Half Nelson. 재즈 피아니스트 레드 갈란드의 섬세한 피아노 소리가 오늘 아침의 감정을 더욱 북돋아 주고 있다! 몇 시간 뒤면 Relax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 앨범이 약간의 틈새를 보이는 공간을 채워줄 것이다. 째즈 추천글이 절대적으로 아닌데, 오늘도 역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는지라 잠시 동안만 음악 얘기를 하게 된다. 어찌 쨌든, 이왕 하는 김에 If I Were A Bell 결코 틀리지 않은 선곡이라고 감히 또 감히.


나의 첫 오프라인 공간 탄생 1주년이 다가온다. 오전 9시 즈음인가 옻나무 그리고 닭 육수로 푸욱 삶아진 한국 전통 수프에 찬 밥을 싸악 말아먹으며 뱃속을 채웠다. 옻닭을 끓이는 동안 우리 집 욕실에는 욕조가 있다. 나의 소울 플레이스다. 옻닭이 팔팔 끓여지면서 내 허기를 채우는 동안 욕조에 뜨뜻미지근한 목욕물을 동시에 채웠다. 뜨뜻미지근한 아침밥으로 속을 채운 뒤 벌거벗은 몸을 가볍게 씻어내고 뜨뜻미지근한 소울 플레이스에 물기 가득한 몸을 푸욱 던졌다. 잔잔했던 목욕물은 몸을 거침없이 담가서 그런지 휘황하게 휘몰아쳤다. 아, 물이 휘몰아치든 말든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물은 뜨거운데 시원하다고 육성으로 내뱉었다. '아으 시원해, 아으 좋아'만 300 하고도 10번은 내뱉었다(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그렇다).


목욕하는 동안 음악은 멈추고 싶었다. 음악을 멈추고 목욕물은 한가득이지만 때론 사치를 부리는 행동이 있는데, 바로 가득 찬 물속에 앉아 머리 위로 샤워기 물을 쏟아내리는 짓거리. 물이 넘치다 못해 홍수가 날 지경이지만 배수구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에 마음 편하게 사치를 부릴 수 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푸어링 하는 사치는 목욕탕-집 왕복 주유비, 목욕비, 목욕 후 제티 혹은 봉봉 혹은 식혜 혹은 포카리스웨트와 같은 식음료비 그리고 어딘가로 또 영감거리를 찾는다는 핑계로 쓰이는 충동적인 금액 모두를 합친 자기 합리화 사치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기로 한지 몇 년 됐다. 그냥 행복하다. 몸은 뜨겁지만 머리엔 차가운 물이 쏟아질 때 행복하다. 추운 겨울에 전기 매트를 풀가동하고 찬바람 살랑 선풍기나 문을 살짝쿵 여는 그런 황홀함.


자기 합리화 사치를 부린 지 30여 분이 지나고 샤워기 물을 투욱 꺼버렸다. 고요함 속 환풍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동네 저수지 벤치에 앉아 눈에 당연히 보이지 않는 바람에 등에 엎여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도 같았다. 그렇게 강제로 세뇌시킨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뜬 채 멍을 때리고 눈을 감은 채 잠에 들기 전 상태 그러니까 명상을 30여 분 동안 즐겼다. 이 또한 황홀함. 눈을 뜨니 잠에서 깬 것처럼 개운했다. 황홀함 뒤에 오는 개운함의 감정을 경험하고 나서 계속 즐기는 나만의 취미다. 단, 조심해야 되는 게 있는데 이 감정 뒤에 오는 심심함을 주의해야 한다.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나는 결국 유튜브를 택했다. 피식 대학의 너드학개론 사랑편의 서막은 나를 미친 듯이 웃게 했다. 나는 너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웃었다.


너드학개론 강의가 끝으로 갈수록 쩝쩌업거리며 쓴웃음으로 끝났다. '뭐지. 뭐지 이거. 괜히 봤다. 도파민에 중독됐다고. 도파민에 중독됐을 뿐이야.'라고 자기 합리화했다. '재밌었어. 웃었잖아. 그럼 됐어.'


이러한 짓거리를 3시간 동안 반복했다. 팅팅 불어버린 몸을 일으켜고 몸을 씻어내는데, 문뜩 나의 첫 오프라인 공간 탄생 1주년이 다가옴을 인지했다.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사치를 부릴 때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물이 아닌 내 육체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이었다. 눈물은 반드시 슬플 때만 흘러내렸다면 오늘은 행복에 겨운 눈물을 미친 듯이 쏟아냈다. 이찬혁의 파노라마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은 나부터 시작해 나를 사랑해 주고 내 공간을 사랑해 주는 고도들의 미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대가를 지불하고 고마움을 전하는 이들에게 '제가 더 감사합니다.'를 반드시 건네었던 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대들 덕분에 난 행복에 겨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떻게 보답하지. 어떻게 보답해야 되는 걸까.'


나의 용기가 폭풍 때의 장마처럼 푹 꺼지고 말 때마다 오늘처럼 그대들의 미소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만을 기도해야겠다. 지금은 난 그대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힘만 남아있다. 내가 조금 느리고 나약한 걸 스스로가 잘 알기에 내가 조금 힘을 낼 수 있을 그날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난 기다림을 참 좋아한다. 예외가 있다면 '해방'만큼은 기다리지 말고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는 것. 무작정 현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도망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도망만 치고 후회로 가득한 나날을 살아왔다면, 이젠 해방만큼은 우연이 아닌 반드시 철저한 '계획'대로 쟁취하기로 했다. 난 해방을 기다리지 말고, 반드시 쟁취해 나아갈 거라고 그대들에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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