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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Jun 04. 2024

나른한 오후 3시에 내가 선택한 레코드는 다름 아닌 겸손과 절제의 째즈 기타리스트 짐 홀의 Blue Dove. 펑키한 째즈가 잠을 깨우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딩가딩가링을 기꺼이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대학생 손님들의 집중력 제고를 위함이다. 덕분에 난 눈꺼풀이 한없이 무거워지고 있다. 손님 앞에서 자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가끔 있는 일인지라 크게 부담되진 않지만, 오늘은 괜스레 잠을 쫓아내면서까지 글을 끄적이고 싶다.


때. 타이밍이라고 하면 조금 더 쉽게 접근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근 한 달 가까이 육체와 정신 모두가 동반된 고통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해방보다 탈출이라는 원인 키워드에 힘이 좀 더 실린 것을 보아하니 난 지금 방전되기 일보가 직전이다. 내 공간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진심이다. 탈출하고 싶을 때면 오히려 내 공간에서 잠을 자서라도 종일 사랑에 빠지는 노력까지 할 정도니까.


여전히 나른한 오후 4시에 내가 선택한 레코드는 겸손과 절제 그렇다. 짐 홀과 내가 사랑하는 째즈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 Undercurrent 앨범이다. Side 1이 아닌 Side 2부터 살포시 올려놓은 뒤 바늘침을 Romain 트랙에 조금 더 살포시 올려놓았다. 덕분에 난 눈꺼풀이 무너지고 말았다. 사르르 잠이 쏟아진다. 손님 앞에서 자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왔다. 아, Skating In Central Park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잔다.


때. 멈추어야 할. 기다림과는 약간 거리가 멀다. 내게 있어서 기다림은 반드시 대상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그리고 기다림은 고통이라는 불편한 감정이 반드시 수반되기 일쑤이기에. 멈추는 행위는 말 그대로 내게 조금이라도 고통을 주는 존재들을 없애는 작업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훌륭한 말이 12년 만에 체감이 되는 때이다. 난 오늘 멈추기로 했다. 아니 멈추었다.


잔다는 건 새하얀 거짓말이다. Side 2에서 휘리릭 뒤집어 Side 1을 살며시 올려놓은 뒤 바늘침을 마일스, 쳇 베이커의 트럼펫이 쏙 빠진 빌 에번스와 짐 홀의 My Funny Valentine 트랙에 꾸욱 올려놓았다. 피아노와 기타가 오후 4시 30분 채 안 되는 시간을 나른함에서 씰룩함으로 상전이 시켜준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슬픔과 불안에 관하여 끄적이는데 미간이 상류의 깊은 협곡을 이룬 듯했지만, 지금은 평탄한 개울과도 같다.


관계를 멈추었다. 휴대폰에서 SNS를 삭제하고 지낸 지 한 달 가까이 돼 가고 있는데, 참으로 행복하다.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것에서 오는 행복.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술술 읽히는 것에서 오는 행복. 기즈키가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와타나베가 나인 것 같기도 하는 고민만 할 수 있는 것에서 오는 행복. 내 공간에서 집으로 가는 길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 것에서 오는 행복. 별거 아니었다.


며칠 전 퇴사 후 프랑스 여행 계획을 짜는 윤정과 몇 마디 나누었다. 매일 연락하고 지내는 상대가 생각보다 재미없지 않으냐고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와 매일 모든 삶을 공유한다고 가정하고, 그이와 대면했을 때 무슨 더 흥미로운 얘기를 나눌 수 있겠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 대면하기 전 설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건 고통 없는 기다림이다. 고통 없이 기다릴 수 있다. 멈추어야 할 때이다.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글의 백그라운드뮤직은 언제나 특유의 녹녹하고 섬세한 보컬이 매력적인 퓨전 째즈와 팝의 중간적 색채의 음악가 Michael Franks다. Blue Pacific 앨범 중 Woman in the Waves를 나른한 오후에 사랑해 보자. 충남 태안군 파도리로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이 물씬 든다. 파도리로 해방하는 그날까지 멈추기로 했다. 아니, 멈추었다. 파도리는 째즈와 기다림, 고요함, 마침내 사랑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다. 신기하다. Michael Franks의 음악이 흐르자 손님들의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재빠르게 짐 홀과 빌 에번스 레코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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