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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Apr 12. 2023

웃기려고 개명한 훈이가

훈이는 툭하면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무조건적으로 받는 친구와 아닌 친구 중 후자에 속한다. 훈이와 나와의 물리적 거리는 도보로 십분 이내다. 훈이는 기버Giver다. 시간과 돈이라는 자원을 나에게 아낌없이 준다. 훈이가 해준 것에 비하면 나는 무조건적인 테이커Taker 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적으로 만나야 한다. 훈이에게 자원을 제공하려고 해도 매번 거절당한다. 어느 날 퇴사한 훈이에게 위로와 응원을 건네고자 일부러 안부를 물었다. 역시 통하지 않는 훈이다. 주변에서 훈이의 평판은 십 점 만점에 몽고반점 수준이다. 훈이는 개명한 이름이다. 웃기려고 개명한 줄 알았다. 개명한 이유를 묻자 ‘웃기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웃기려고 개명하다니 웃기긴 했다. 훈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훈이가 폴란드로 떠났다.




2022. 10

00 식당


오랜만에 만난 석이, 창이, 훈이와 돼지김치구이에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굉장히 반가웠다. 반가움은 소주 한 잔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술에게 지배당하기 전에 그들의 표정과 기분을 재빠르게 살폈다. 몇 달 전 취업에 성공해 행복한 석이, 며칠 전 원하던 이직에 성공해 행복한 창이, 퇴사에 성공해 누구보다 행복 가득한 훈이, 그리고 괴롭고 힘든 ‘나’. 왁자지껄 자기만의 행복이야기를 릴레이 하듯 이어나갔다. 마침내 내 순서가 다가왔다.


“나 요즘 너무 행복해! 근데,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또 또 또 힘든 얘기 한다!”


훈이가 내 말을 거침없이 끊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석이, 창이 그리고 훈이의 표정을 재빨리 살폈다. 행복해 보였던 그들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죽상 그 자체였다.




며칠간 훈이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우물우물. 기분 나쁘다.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끊었을까. 우물우물.. 또 또 또라고? 우물우물… 힘든 얘기를 내가 얼마나 했다고? 훈이의 말을 갈피조차 잡질 못했다. 일부러 약속을 잡았다. 훈이는 역시 재밌었다. 자기만의 기묘한 이야기를 쨉쨉 원투. 훈이는 TKO 기회를 내게 자연스레 건넸다. 쨉쨉 원투. 훅을 날리려는 순간 그제야 알았다. 그날 00 식당에서 훈이가 내 말을 거침없이 끊었던 이유를. 턱 끝까지 찰랑거리는 부정의 단어를 꾸욱 삼켰다. 그리고 관중들의 표정과 기분을 재빨리 살폈다. 거울을 보는 듯했다. 나의 행복한 감정에서 드러난 표정은 그들의 얼굴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


감정이 상대방에게 전이된다는 것도 모른 채 산다는 것. 끔찍하다. 훈이는 직설적이다. 아무 말 없이 끄덕여 준다는 것이 위로와 공감이라 생각했던 내게만 직설적이다. 훈이는 자신도 모르는 철학을 내게 전하고 그렇게 폴란드로 떠났다. 폴란드로 가는 이유를 물었다. 훈이는 단순하다. 훈이는 돈 벌려고 떠난다고 말했다. 내 생각엔 훈이는 웃기려고 가는 듯하다. 기약 없이 떠난 훈이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은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무조건적으로 그의 전화를 받을 준비하고 있는 내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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