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전까지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우연히 부질없는 검은 점들 중 하나인 네가 보였던 것이다. 속는 셈 치고 까닭이 있진 않을까 싶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기대했던 내가 참 밉다. 네가 날 우연히 바라볼 - 기약 없는 - 날만 기다리기로 하였다. 마침내 나는 다시금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남김없이 오를 테다. 너를 기꺼이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남김없이 오를 테다.
잭다니엘 올드 넘버 세븐을 번쩍 들었다. 에취! 죄송합니다. 성필은 페이지를 넘겼다. 잭, 잭, 짹, 짹. 참새의 모가지를 옷걸이로 건드리고 있다. 야, 죽었어. 그만해. 성필이 말린다. 배고파서 죽었나. 잿빛으로 물든 오목한 참새 배때지를 옷걸이로 툭툭 찔렀다. 야, 죽었어. 그만하라구. 새까만 복면을 쓰고 있는 너를 말린다. 졸다가 죽었나. 주인장은 위스키가 담긴 온 더록 잔에 콜라를 붓고선 팔뚝의 핏줄까지 터쳐버릴 기세로 노오란 레몬을 쥐어짰다. 이제는 병아리가 눈을 감곤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꾸벅 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졸린가. 성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새까만 복면을 쓰고 있는 네가 병아리 왼쪽 날갯죽지에 손을 올렸다. 너로 인해 은방울꽃처럼 가까스로 맺혀 있던 병아리의 투명한 눈물이 톡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오후 세 시는 손님이 들어오면 지친 듯한 미소를 짓고선, 아차 싶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도 졸음이 금세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다. 성필은 카페 사락에 있었다. 그는 여름의 끝자락 비가 한바탕 쏟아졌기에, 그리고 유독 몽롱하고 쳐지는 이 시간으로부터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쌓아둔 책들 사이로 마음에 드는 것을 끄집어내었다. 그러곤 손바닥이나 겨드랑이에 책을 껴 넣은 뒤 각자의 자리에서 읽어냈다. 성필은 체호프의 단편선을 보면서 웃고 있다. 십 분 정도 흘렀을까. 그는 희랍어 가득한 세탁기 매뉴얼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고 미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가 눈을 떴다. 체호프는 성필이 눈을 뜨자 이어 말했다. 다시 웃었다.
머리 양 갈래로 땋아도 되겠어요. 검은 말총머리 아주머니가 잭콕 한 모금을 마시곤 성필에게 안녕을 건넸다. 네?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머리 양 갈래로 땋아도 되겠다구요. 성필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목덜미까지 덮인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자를 때가 되긴 했구나. 그의 두 손은 요즘 머리 손질이 수월하지 않은지 외출 직전 모자로 향했다. 지난 주말 부족한 모자를 옷장에 채우기 위해 두 개 더 사기도 했다. 머리칼을 조금 다듬기만 했더라면 충동적으로 모자를 구매할 일은 없었을 테다. 그리고 노랑 양말 신었냐는 아주머니 안녕을 되묻지 않고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니다. 그저 오후 세 시가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성필은 정신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말했었다. 몸속의 호르몬은 계절의 속도를 따라오질 못하는데 어찌 이겨낼 수 있겠어요. 잠이 오면 오는 대로 맞이해 보세요. 성필은 습윤한 공기, 날숨 그리고 웨스 몽고메리의 레코드와 함께 지루한 오후 세 시를 통과한다. 눈을 감는다. 잠에 든다. 레코드가 끝이 났음을 알리는 바늘 튕기는 소리. 오후 세 시 사십 분. 잠에서 깨어난 성필은 언젠가 레코드가 가득 찬 방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얼음이 다 녹은 커피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성필은 다시 체호프의 단편선을 보면서 웃었다.
카페 안이 기울어가는 오후의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했을 때 성필은 잠을 맞이하라는 그녀로부터 심심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어쩌면 무탈하기에 드는 감정이겠지요. 성필은 답했다. 무엇을 해야만 심심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저녁을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팔꿈치로 쿡 찌르듯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