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무릎 아래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은 수아가 앞장서 좁은 비탈길을 내려갔다. 다음에 올 땐 가지치기를 좀 해야겠어요, 조심히 내려오세요. 그녀가 뒤따라오는 성필에게 말했다. 둘은 가시나무 사이 비탈길을 지나 못의 끝자락 응달진 곳에 도착했다. 그러곤 캠핑용 의자를 산등성이 아래 커다란 못을 바로보도록 펼쳐내고 앉았다. 둘은 배꼽을 마주 본 채 한참 농담 - 근력 강화 방법, 재채기를 막을 수 있는 법, 방울토마토 이쁘게 자르는 법, 악력기 구매의사결정과정과 같은 - 을 주고받았다. 아, 기억났어요. 그때 수아님이랑 사락 사장님이 체호프 소설을 보면서 웃고 계셨어요. 수아님이 대뜸 저한테 안 읽어보셨으면 한번 읽어보라고 말을 걸었어요. 성필은 눈을 북동쪽으로 치켜세우곤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오, 맞아요! 체호프 또 생각하니까 웃음 나와요. 그때 성필님 버건디 브이넥 스웨터 입었던 게 생각나네요, 진짜 잘 어울렸었는데. 농담에 이어 둘은 첫인상에 관한 진담까지 줄지어 놓았다.
짧은 황혼이 어둠에 삼켜질 무렵 수아는 선명하고 투명한 사람이 더 이상 그녀만의 휴식처라고 볼 수 없겠다,라고 웃음기를 잔뜩 빼며 말했다. 그러곤 눈에 적확하게 띄는 곳을 중얼거렸다. 봄이면 남해로 옅은 분홍빛 줄지은 벚꽃길을, 여름이면 서해로 일렁이는 파도 결에 따라 움직이는 윤슬 가득한 해변을 거닐고, 가을이면 우거진 미루나무 아래 도서관으로 향해요, 그리고 겨울이면 갈피 잃은 차가운 두 손을 패디드 재킷에 구겨 넣고 잿빛 거리를 거닐죠,라고 일종의 해방 공간을 그녀에겐 자세하면서 성필에겐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녀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이어 말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기다림 없이 벚꽃, 해변, 도서관 그리고 잿빛 거리를 곧장 갈 수 있어요. 이 자리에서 눈만 지그시 감은 채로요. 성필은 눈을 지그시 감고선 숨을 깊게 연거푸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 잡동사니들이 제각기 소리 내어 울었다. 성필은 잠에 들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땅거미 질 무렵이었다. 성필의 기억상으로 이토록 깊은 잠에 빠진 적이 없었다. 꿈인가. 성필은 끔뻑거리며 거듭 중얼거렸다. 성필이 적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내팽개치고 누군갈 탓하며 떠나버렸던 날, 포기도 용기랍시고 위안을 삼은 채 훌쩍 떠나버렸던 날, 죽음을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심각히 감정만 이입했던 날, 그리고 완벽한 시간의 실종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을 퀭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성필은 황홀했던 그녀와의 저녁 날을 또다시 선연하게 꿈꾸었다. 그는 핸드폰을 째려보며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연한 주황빛으로 물든 방구석 천장을 바라보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태양은 아직 저물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튿날 성필은 시곗바늘이 여덟 시를 가리킬 때 어쩌면 볼 수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하릴없이 매일 아침 여덟 시를 기다린다고 해서 같은 그림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을바람에 휩쓸린 구름의 모양이 작년과 같아야 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내밀어야만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 나타나는 이 모든 존재를 동시에 포착해야만 했다. 성필은 눈동자를 펜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꽉 찬 일 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림자 테두리를 그렸다. 끊기지 않도록 천천히. 사라졌다. 마음이 안온해진 그는 그제야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
지겹고 지친 듯한 미소를 지었던 오후 세 시의 주인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첫 모금에서 어, 잘 익은 적포도의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채우고, 이어서 음, 장미꽃 향기가 은은히 피어올라요. 예. 중간에 쩝쩝거리시면 조청이나 꿀의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실 거예요. 예. 맛있게 드세요. 성필은 카페 사락 주인장의 아침 햇살처럼 따사로운 목소리, 말의 마디마다 귓전을 울리는 의성어를 사랑했다. 감사합니다. 어, 안녕히 계세요. 성필이 나가는 문을 열려고 하자 들어오는 문을 수아가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