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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거름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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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이번 일요일엔 친구 생일도, 축제에 갈 일도 없어요. 저녁 먹으러 가요! 성필은 이번 일요일에도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수아에게 좋다고 대답했다. 일요일 저녁 식사는 그녀의 단골 가게인 돼지국밥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네이비 브이넥 스웨터, 베이지 치노 팬츠 그리고 스웨이드 처카 부츠를 택한 성필의 간결한 일요일 착장으로부터 수아는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를 떠올렸다. 그녀는 빌 에반스라는 이름이나 성필의 옷매무새뿐 아니라 곡의 몇 마디에서 완연한 가을이 왔음을 발견했다.


은행나무 아래 국밥집은 가을이 오면 짭조름한 소금이 휘날리는 구운 은행 꼬치를 서비스로 주신다며 수아가 주문한 돈가스를 썰면서 말했다. 성필은 김이 펄펄 나는 돼지국밥 뚝배기에 숟가락을 넣고선 반시계 방향으로 저었다. 은행 꼬치를 먹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아직도 돈가스를 주문한 이유를 모른 채. 여기 사장님 입맛이 삼삼하거든요. 국밥, 돈가스 튀김옷, 소스까지 완벽하게 삼삼해요. 은행 꼬치만 빼구요. 이렇게 은행을 양파의 단맛이 애매한 소스에 넣구요. 돈가스를 푹 담가요. 드셔보세요. 평소 삼삼한 것을 좋아하는 성필을 그녀는 몰랐다. 성필은 아- 하고 입을 벌리려다 사장님과 눈을 마주치곤 다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둘은 동네 한 바퀴를 자연스레 걸었다. 입이 심심했는지 그녀의 눈은 아이스크림 가게 쪽으로 성필을 끌어당겼다. 성필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냐고 수아가 물었다. 먹고 싶었던 거 아니었냐며 성필이 대답하듯 물었다. 아니요, 늘 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걸린 오픈 시간이 왜 오전 여덟 시 사십 분인지 궁금해서 쳐다보게 돼요. 여덟 시 정각도 아니고, 여덟 시 삼십 분도 아니고, 왜 사십 분일까요. 성필은 주인장 마음이지 않을까요,라고 곧장 대답했다. 수아는 성필의 오른 팔뚝을 손으로 탁 치곤 깨달은 듯 말했다. 그러네요, 주인장 마음이겠지요. 수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냐며 성필이 물었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이스크림은 성필에게 쏘라고 하자, 그는 지갑을 두고 왔다는 식의 재미없는 제스처 - 양손으로 바지 뒷주머니부터 양말까지 툭 툭 치는 - 를 취했다. 그리고 플레인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수아는 웃으며 그와 같은 것을 골랐다.


아무 말 없이 반 바퀴쯤 더 걷고 있을 무렵 수아는 가로수 길 가운데 서서 성필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애를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빈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기를 물고 있던 성필은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성필은 그녀의 눈을 잠시 쳐다보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는 괜스레 두근거리는 왼쪽 가슴 한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걷다 이제 집으로 가자며 그녀가 말했다. 성필은 묘하게 아쉬웠다. 오른 아랫입술을 윗니로 물어뜯고선 좋다며 답했다.


연락하면서 지내는 건 어때요? 성필은 웬일로 고요한 차 안에서 물었다. 머뭇거림과 함께 수줍은 그녀의 말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좋아요. 지금은 잠이 쏟아질 거 같으니 자고 일어나서 연락하겠다며 그녀는 일요일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성필은 가볍게 떨리는 입술을 오른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차에서 내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성필은 이것이 일종의 고백인지 헷갈렸다. 그럴때마다 지난 오 개월 동안 수아와 보냈던 시간과 공간이 빠르게 스쳤다. 과거를 반복하기 싫었던 성필은 자고 있을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내일 오후 다섯 시에 카페 산조(山鳥)에서 보자고 말이다.


내일 오후 다섯 시 두 시간 전 성필은 그녀를 위한 편지를 끄적였다. 지난 오 개월 동안 그녀를 향한 심정에 관하여. 편지를 써내려 가는 소리가 그의 심장에 가벼운 반응을 주었다. 설렘 -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양손에 쥐곤 생일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살살 걸어가는 동안 느껴지는 그러한 -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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