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어찌 된 일인지 확신했던 수아의 마음은 성필의 생각과 달랐다. 수화기 너머 부끄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 은방울꽃 눈물이 맺힌 수아의 눈을 보아하니 적어도 진심이었다. 오후 세 시 설레는 마음으로 끄적였던 편지가 부끄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리송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연락하면서 지내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성필님한테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속상한 성필의 마음을 달래듯이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 그만 듣고 싶어요. 성필은 과거가 반복됐음을 알아챘다. 그녀로부터 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하지 못하고 둘러대기 바빴던 지나온 현재들이 스치기 시작했다.
기다려주기를 바랐다. 성필은 한 달 정도만 기다려 달라며 주희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사실 성필은 백일 정도는 꼭 필요했다. 사물이나 대상이 세상에 있다가 불현듯 사라졌다. 익숙했다가 그립고 소중해진다. 역으로 사물이나 대상이 세상에 없다가 불현듯 앞에 툭 나타났다. 신선하고 끌려하거나 의문을 삼는다. 설렘 가득한 삶에 중독된 주희에게 성필은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 가을이 오면 부드러워질 것만 같던 햇살이 내 마음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 것에 슬퍼하지도, 재촉하지도 말아 달라며 말했다. 주희는 성필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날 만났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밥은 같이 왜 먹었으며, 커피와 술은 왜 마셨냐고 물었다. 성필은 대답을 회피했다. 도리어 크리스마스 때 뭐 할래?라고 주희에게 물었다. 그녀는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성필은 고백했고 주희는 기뻐했다. 둘은 손을 잡고 캐롤이 흐르는 거리를 걸었다. 성필은 서연 - 성필에게서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 생각을 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성필과 주희는 대관람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때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성필은 피곤했다. 삼 년이 흘렀다. 성필은 피곤했다. 가끔 서연 생각을 했다. 주희는 바다 보러 갈까? 성필은 주희가 피곤했다. 주희가 집으로 들어갔다. 성필은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연애는 불행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성필은 수아에게 솔직하게 거절하도록 유도 질문을 던졌다. 깊이 있고 뾰족한 수의 질문을 하기는커녕 그는 단순하게 물었다. 좋아하거나 잊지 못하는 사람의 여부를 말이다. 수아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그냥 성필이 좋아서 만났다고 덧붙였다. 성필은 아니라는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냥이라는 말에 사뭇 고마웠다. 성필은 잠시 눈 좀 붙이고 싶다고 말했고 그녀에게도 권했다. 둘은 전원을 껐다.
층고가 높다란 카페 천장 사이를 음악만이 채우고 있었다. 가끔 편안으로 가는 성필과 그녀의 날숨이 더해졌다. 세 곡의 음악이 끝이 날 무렵 성필은 두 눈을 바르르하며 떴다. 아직 곤히 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따금 소파 오른쪽 팔걸이에서 몸을 찬찬히 일으키는 그녀. 주황빛 조명이 눈이 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성필은 그녀의 오른쪽 뺨에서 잘 익은 복숭아의 연분홍빛을 보았다. 둘은 입맛을 다시면서 눈을 마주치고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우수 어린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후 다섯 시에 일어났던 그들의 고백은 일종의 잠투정이었던 것일까.
카페의 유리창은 검게 물들었다. 성필은 어제 좋다고 대답한 까닭을 물었다. 성필님을 잃을까 봐 그랬어요. 좋네요. 성필은 그녀에게 이제 어떻게 하고 싶냐며 물었다. 둘 사이에 관하여. 계속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어찌 된 일인지 성필은 그녀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동의했다. 독수리가 상공을 가로지르며 먹이를 찾듯이 치밀하게 거절할 방법을 그땐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동의하지 않을 이유를 명확히 찾을 수 없던 것이다.
성필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