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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거름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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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다행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면 수아의 부재는 성필에게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그녀와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남을 약속했다면, 약속한 날부터 그날까지 직분에 맞는 일만 남김없이 소진했기 때문이다. 성필만은 그렇게 살아왔다. 성필은 소주 한잔을 쪼옥 들이켰다. 오늘의 안주는 친구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좋아하긴 했던 걸까,라며 성필에게 물었다. 입안에 둥글게 남아 있는 알코올을 단맛이 날 때까지 쩝쩝대는 성필. 친구의 말을 계속해서 쩝쩝거렸다. 그는 대답을 숨긴 채 집으로 돌아와 묵은 일기장을 펼쳐냈다.


'사고야 말았다. 커피? 땡. 책? 땡. 레코드? 하. 정답이다. 닷새 전 즈음 한 영상을 보았는데, 제목은 가물가물하다 못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쓰읍. 한 재즈 평론가의 스쳐가는 말 - 사물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엔 반드시 사물을 향한 물리적 자원의 소비 그러니까 시간 혹은 돈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나는 책을 좋아합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누군가 나의 행방을 추적했을 때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간다거나 내 방구석 책꽂이에 적어도 책의 형태를 한 사물이 꽂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은 또렷하다. 그리고 역시 그의 작고 둥근 뿔테안경은 인상적이었다.'


성필은 비브라포니스트 바비 허처슨의 [Wating] 그리고 색소포니스트 럭키 톰슨의 [Goodbye Yesterday] 레코드를 충동적으로 구매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는 일기장을 덮어내고 바비의 레코드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바비는 강한 리듬감이 빗발치는 하드 밥과 가볍게 툭 던지며 귀를 살랑이는 이지 리스닝 곡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재즈계의 위자드다. 레코드 틈새로 바늘이 스치는 순간, 두 손에 쥔 말렛(mallet)으로 오전 열 두시를 불면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성필은 태양빛에 비추어야 보이는 오른뺨의 작은 솜털이 바짝 곤두섰음을 느끼자 럭키 톰슨 레코드로 바꿨다. 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몽환적이었다. 성필은 이슬이 가득 맺힌 나뭇잎들의 집합 혹은 강 주변 물안개가 자욱한 잿빛 거리 위에 놓여있었다. 그의 소리는 나뭇잎 사이에 비치는 일렁이는 햇살이다. 그의 소리는 안개를 흩어 없애고 맑게 개도록 하늬라.


재즈에 사르르 녹아버려 잠에 들기 일보가 직전 메시지 알람이 성필을 깨웠다. 십 년 전 사귀었던 나현의 안부였다. 그녀의 이름을 본 순간 성필은 의아했다. 그리고 빠르게 그녀의 모습 - 검붉은 생머리에 주름진 짧은 치마, 숨겨둔 말이 있는 것처럼 꾹 다문 입술 그리고 왼쪽 귓불의 볼록한 점 - 이 스쳤다. 얼굴이 떠오르자 메시지 내용을 낭독하는 나현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성필은 속이 울렁거렸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 또한 느꼈다. 그녀의 메시지에 곧장 답하지 않았다. 소리 없는 하얀 안개를 가장한 담배 연기가 방 안을 채운다. 성필은 럭키 톰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곤 결심한 듯 힘이 바싹 들어간 성필의 두 엄지손가락이 메시지를 보냈다.


밥 먹자는 그녀에게 더부룩하지만 좋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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