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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해거름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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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시곗바늘이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다. 나현이 사준 커피 한 잔은 성필의 졸음을 깨우지 못했다. 눈치챈 그녀는 잠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충주 시내 한 바퀴를 돌아보자며 말을 걸었다.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던 성필은 좋다고 답했다. 성필은 운전석에 앉는 순간 창문을 내렸다. 비에 젖은 쿰쿰한 아스팔트 냄새를 맡고 싶었던 것이었다. 음악도, 내비게이션 소리도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비바람에 휘날렸다. 성필은 그제야 창문을 올렸다. 차 안은 금세 그녀의 머리칼 냄새로 가득해졌다. 따듯한 물에 녹아든 유자 향을 머금은 듯했다. 성필은 유자색 신호등에 맞추어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아 냈다. 유난히 좌측 방향지시등 소리가 똑딱똑딱 크게 들렸다. 농몽한 오후 세 시 삼심 분.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똑딱똑딱. 그녀는 오른 검지로 창문을 내렸다. 영화관, 떡볶이집, 아이스크림 가게, 버스정류장 그리고 공설시장 간판들을 창 너머로 중얼거렸다.


이제 집으로 가자며 그녀가 말했다. 성필의 잠은 집으로 가자는 알람이 울리자 화들짝 깨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오늘날 성필의 모습을 중얼거렸다. 어른스러워진 모습에 당황했다며, 차분하게 말 한마디를 기다려 주어서 고맙다며, 십 년 전 성필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상하게 했던 나날들에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성필은 그녀의 고백을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이었다. 그렇기에 헤어졌던 것이다. 나현은 아무 말 없는 성필을 힐끗 바라보았다. 왼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뒤로 쓸어 넘겼다. 성필의 심장은 우측 방향지시등 소리에 맞추어 두근거렸다. 성적으로 끌렸기 때문이다. 차 안이 익숙한 고요함으로 가득해질수록 성필의 입 안은 메말라 갔다. 나현의 입 안에서 꿀을 씹는 듯한 끈적한 소리가 성필의 귓전을 울렸다. 그녀가 성필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안타까운 눈초리로 날 아니, 누구든 바라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성필은 그녀가 떠난 빈 조수석을 바라보며 성적으로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백마령 터널을 통과하고 성필의 눈앞에는 보랏빛 새털구름이 흩날렸다. 새털구름 아래 신호등이 붉게 밝혀졌다. 성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뒤차의 클락션 소리 덕분에 성필은 눈을 뜰 수 있었다. 성필은 도망치듯 액셀을 밟곤 미안한 소리 없는 비상등을 세 번 울렸다. 증평에서 마지막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빈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칼 한 가닥이 축 늘어진 채 앉아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수아님 머리칼인가. 밥 먹자는 그녀의 말에 속이 더부룩할 게 분명했지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성적 끌림은 추호도 없었다. 어긋난 사랑이었다. 괜스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 번 더 이별하고 오는 길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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