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일곱 시에 내리는 빗소리는 새벽보다 멜랑콜리하게 들리지 않는다. 성필의 집 앞에 레코드 택배가 익명으로 도착해 있었다. 그는 오후 일곱 시를 빌미 삼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수아가 경탄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성필은 익명의 인물이 그녀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지만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복잡했던 그의 마음은 경주 여행 중인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연락하겠다는 말에 대뜸 흐뭇해졌다.
통화 종료 후 성필은 새까만 핸드폰 화면에 흐뭇한 미소가 비친 것을 보았다. 얇은 빗방울 하나가 화면에 톡 하고 떨어졌다. 빗방울이 가로등 빛과 함께 여러 개로 조각났다. 성필은 왼 엉덩이에 빗방울을 대충 쓱 닦았다. 고개를 들고 한입 베어 문 듯한 초승달을 멍하니 바라봤다. 담배 연기로 달의 빈 곳을 채웠다. 수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성필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보냈어요. 성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목소리를 음소거한 뒤 마저 담배를 태웠다. 좋아하긴 했던 걸까,라며 물었던 고향 친구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성필은 방구석으로 곧장 달려가 수아에게 선물할 럭키 톰슨의 레코드를 꺼내 든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익명의 아니 수아의 레코드를 올려놓았다. 따스해서 더 쓸쓸한 듯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일렉 기타 소리는 선선했다가도 차갑게 느껴졌다. 성필은 낯선 음악을 멈췄고 욕실로 향했다.
성필은 벌거벗은 채 목욕물을 받으며 스트레칭했다. 샤워까지 마친 그는 뜨뜻미지근한 욕조에 젖은 몸을 푹 담갔다. 잔잔했던 목욕물은 꿀렁거리며 휘몰아쳤다. 물이 잔잔해지자 환풍기 팬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욕조 위 자그마한 창문을 오른쪽으로 살짝 열었다. 눈에 마땅히 보이지 않는 가을 찬바람이 어서 오셨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욕조 위로 나온 두 팔의 온도를 찬찬히 떨어뜨렸다. 눈을 감고 입으로 물방귀를 비정기적으로 뀌기도 했다.
욕조 물의 온도와 바람 온도가 엇비슷해질 무렵 성필은 앉은 채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내렸다. 욕조 물이 넘치다 못해 홍수가 날 지경에 이르렀다. 배수구가 본인이 맡은 직무를 충분히 이해하며 수행하고 있음을 성필은 알았다. 때문에 그는 편하게 사치를 부렸다. 이십 여분이 지나고 샤워기 물을 툭 껐다. 팅팅 불어버린 몸을 일으키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그의 용기가 폭풍 때의 촛불처럼 푹 꺼지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목욕을 마친 성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방으로 들어간 뒤 나릿한 침대에 몸을 맡겼다. 그는 나현에게 반가웠고, 잘 지내라는 메시지를 썼다가 지운 채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