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가을바람은 그녀의 오른 손가락 덕분에 보이는 듯했다. 새까맣고 너울거리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현이 걸어왔다. 성필은 보이지 않던 그녀의 눈가에서 가느다란 주름 서너 개, 살짝 풀린 짙었던 쌍꺼풀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오후 한 시에 만난 둘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데이브 발렌틴의 플루트 재즈 연주가 어색한 차 안을 산뜻하게 연출하려고 애를 썼다.
음악이 멈추고 차 안은 금시에 고요해졌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성필은 그럼에도 헛기침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왼쪽 귓불의 볼록한 점이 성필의 눈에 띄었다. 그는 당장 집으로 가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머리를 질끈 묶고 훤히 귓불을 보여주곤 침대 위에서,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던 그녀의 모습이 스쳤기 때문이다. 성필은 오후 여섯 시까지 집에 가야만 한다며 까닭 없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떠한 아쉬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알겠다고만 대답한 뒤 대뜸 음악을 추천했다. 성필이 너 김형중 노래 좋아했잖아. 아직도 좋아해? 응. 성필은 심심한 공감이 섞인 미지근한 외마디만 던질 뿐이었다. 더 클래식도 좋아하려나. 물론이지. <내 슬픔만큼 그대가 행복하길> 참 많이 들었어. 성필은 몰랐기 때문에 침묵했지만 고개는 건물 사이로 휙 스쳐가는 새처럼 재빠르게 음악에 맞추어 끄덕거렸다. 눈치챈 나현은 그의 취향이 여전하다며 신이 나 음악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성필은 가까운 레스토랑이 멀게만 느껴졌다.
오후 한 시 삼십 분. 나현은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가 담긴 종지에 노릇하게 구워진 모닝롤 모서리를 살짝 찍어 성필에게 건넸다. 그는 순간 볼록한 점으로부터 올라왔던 귀가 욕구가 사그라들었다. 손대지 않은 그녀의 모닝롤마저 탐을 내려던 성필의 욕구는 주문하신 알리오 올리오 어느 쪽에 드릴까요,라는 종업원의 친절한 말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성필은 알리오 올리오에 있었고, 그녀는 쉬림프 로제 파스타에 있었다.
배가 불러온 성필은 그녀의 안부를 드디어 물었다. 없었으면 좋겠다고 연신 말했던 그녀의 남동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바뀌었고, 십 년 전 그녀와 집 앞에서 따듯한 된장찌개, 든든한 소갈비 식사를 함께했던 어머니는 오늘도 건강히 계신다는 말로 답했다. 성필은 그녀의 동생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곱게 접어 왼쪽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소리만이 빈 접시 위를 맴돌았다. 그녀를 향한 동정을 감지한 성필은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향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내뱉기를 거듭했다.
성필은 화장실에서 나온 뒤 괜스레 계산까지 하고 싶었다. 그는 나현의 잘 먹었다는 차분한 인사와 가느다란 주름 서너 개가 보이는 눈웃음으로부터 보람을 느꼈다. 성필은 가까운 카페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현에게 커피는 네가 사라는 재미없는 농담을 건넸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녀는 당연하지,라며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