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쁘지 않은 날, 나는 누구일까

by 메이다니

바쁘지 않은 날이면 조금 당황한다. 아무런 일정도 없고, 마감도 없고, 연락이 뜸한 날. 전날 밤엔 여유로운 하루를 기대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면 어딘가 허전하다. 늦잠을 자도 되는 날인데, 이상하게 더 일찍 눈이 떠지고, 오늘은 뭘 해야 할지, 뭘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사실 이 일은 바쁠 때와 아닐 때의 온도차가 크다.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다음 계약이 잡히기 전까지는 휴식과 공백이 갑자기 밀려온다. 그래서 그런지 바쁜 날엔 내가 유능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엔 나란 사람의 존재감도 흐릿해진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 뭐 하는 사람이지? 나는 지금 누구지?

일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나인데, 이상하게 프리랜서로 오래 일하다 보면 ‘일을 하고 있는 나’만이 진짜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일이고, 누군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도 결국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로 정리된다. 그러다 보니 일정이 비는 날, 나는 방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쉬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된 건 몇 해 전부터다. 그 전엔 쉴 수 있을 때 무조건 쉬고 봤는데, 이상하게도 쉴수록 불편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여유롭다기보다는 무력했고, 달콤하기보다는 어정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쉬는 시간에도 나를 챙기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은 바쁘지 않은 날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보려 한다. 천천히 걷고, 무심코 지나치던 공간들을 관찰하고, 아무 목적 없이 책을 넘기고, 짧은 글을 써 본다. 그게 아주 대단한 무엇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나는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준다.

바쁘지 않은 날의 나는 조금 조용하고, 어딘가 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날의 나야말로 진짜 나와 대화할 수 있는 드문 순간일지도 모른다. 일이 없어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점점 더 많이 믿고 싶다. 세상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하루에도, 나는 나를 조용히 살아내고 있으니까.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1화‘일’이 나를 말해주는 유일한 수단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