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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n 24. 2022

임신하고 새벽 산책을, 출산하고 미라클모닝을

임신과 출산을 겪은 몸과 마음의 변화 #3


덜컥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37주 5일 차 새벽에 갑작스레 양수가 터져 출산하기까지의 여정은 꽤 부지런한 생활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몸의 변화가 생길수록 나의 마음은 무방비 상태였다. 마음을 다잡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잦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정해진 엔딩을 순순히 기다리기엔 지루했다.  


임신 초기엔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초저녁부터 잠들기 일쑤였다. 입덧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소화 불량으로 밥은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 오로지 갓 구운 식빵과 새콤달콤한 화이트 발사믹 식초와 샐러드, 오렌지맛 하드 아이스크림, 비빔냉면 정도가 입맛에 맞았다. 날씬함에 공들이지 않아도 되는 임신 기간. 안정기에 접어들며 왕성한 식욕으로 수저를 내려놓지 않는 내가 보였다.      


그렇게 임신 중기에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러나 잃은 것도 있다. 잠이다. 누가 둘러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 정도였는데 웬걸 수시로 눈이 번쩍 떠졌다. 일찍 깨어난 새벽에는 동네 마실을 나갔다. 눈이 오는 날, 짙은 안개가 낀 날에도. 동네 운동장의 육상 트랙을 천천히 걸어 다녔고,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거닐었다. 혼자가 아닌 둘의 몸에는 꽤 관대해졌지만 마음은 아직 저 멀리 웅크리고 있었다.      


우연히 미라클모닝을 시작했다. 새벽 네 시 반이나 다섯 시쯤 일어나 차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속내를 노트에 적었다. 돌이켜보면 미라클모닝도 새벽 산책처럼 자주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잠들지 못했기 때문에 택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때쯤부터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밝음을 품은 어두운 새벽에 손이 가는 대로 일기를 쓰면 똑바로 보지 않았던 마음의 얼굴이 숨겨왔던 표정을 드러냈다.   

   

몸을 숙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솟아난 배를 어루만지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임신 중기가 지나도록 뱃속 아기에게 제대로 된 말을 건넨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말을 할지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면 "안녕. 잘 지내지?"가 전부.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직장 동료를 길에서 마주친 것처럼 데면데면했다. 대신 하루가 다르게 아기를 향한 사랑이 커진 남편은 우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그때 내 마음은 어디쯤 당도했던 걸까. 지금 그 일기를 들춰보면 나의 얼굴을 재발견한다.      


"소화가 원활하지 않지만, 입덧은 없다."

"정면으로 누울 수 없지만, 옆으로 누울 수 있지."

"몸이 무거워져 잠을 푹 잘 수 없지만, 두세 시간은 한 번에 잘 수 있어."

"태동 때문에 잠을 뒤척이지만, 그래도 볼록 튀어나오는 게 귀엽네."

 

냉소적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당최 도착지를 알 수 없는 기차표 한 장 쥔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짤막한 글 속에는 ‘긍정성’을 길어 올리려는 게 보였다. 무언가 가능한 것을 찾아서 집중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고 싶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결심하는 사람이었구나.

     

출산하고 조리원을 퇴소한 뒤에는 비정기적으로 아침 일기를 써 내려갔다. 임신했을 땐 잠에서 일찍 깨어나 글을 썼다면, 출산 후에는 체력적·정신적 소모가 몇 배 커졌기에 여유롭게 시간을 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책상 앞에 앉았다. 새벽 세시든, 네시든, 다섯 시든. 새벽 수유하고 나서 잠이 쏟아지는데도 노트를 펼쳤고, 때론 드라마 대본집을 읽으며 신을 분석했다.


평일과 주말, 낮과 밤 모든 게 모호한 나날 속에서 어떻게든 나만의 알맹이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만큼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육아’에 집중하다가도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이 나를 깨우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강박은 정체 모를 그리움을 해소시킨다. 소설을 읽고 싶을 때, 시를 읽고 싶을 때, 공들여 썼던 노트들이 눈에 밟힐 때. 이렇게 무용한 일을 하고 싶을 때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라는 걸 불러왔다.

        



“성장은 크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마치 우리가 나무인 것처럼, 높이를 키우면 다 되는 것처럼. 하지만 성장이란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그것들이 그리는 그림을 읽어냄으로써 차츰 완전해지는 과정일 때가 많다. (중략) 우리는 콜라주처럼 자신을 만든다. 세계관, 사랑할 사람, 살 이유를 조각조각 모은 뒤에 그것을 자신의 신념과 욕망에 부합하는 삶이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해낸다. 적어도 운이 좋은 사람은 그런다.”

     

-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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