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돌봄 시작 : 젖꼭지에 관해
신생아 시기를 지나니 성장의 시간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다. 휴대폰 사진첩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은 사람의 사진으로 빽빽하다.
언젠가 SNS에서 엄마들을 인터뷰하는 광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엄마들에게 휴대폰 사진 앱을 열어달라는 요청. 다수의 엄마들은 귀여운 아이의 사진을 제작진에게 보여주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엄마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 인터뷰어가 다시금 묻는다. 아마 이런 질문이었던 것 같다.
“언제 마지막으로 자신을 찍어봤어요?”
툭 던진 질문에 엄마들은 말문이 막힌 채 사진첩의 스크롤을 내리며 훑어본다. 자신을 찍어본 적이 오래라는 답변을 내놓는 엄마도 있었다. 약간의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왈칵 눈물을 내비치기도 했다. 광고를 보고서야 나도 비슷한 경로를 그대로 밟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처음엔 작은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마냥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손과 발이 참 조그맣구나.”
“눈을 깜빡이네. 윙크인가?”
“하품을 하다니. 지금 찍어야 해!”
찰칵찰칵.
작은 사람은 한 달 만에 폭풍 성장하더니, 지금은 거의 씨름선수처럼 튼실한 허벅지를 자랑한다. 손목과 발등에도 오동통하게 살이 올랐다. 살이 찔만한 곳을 구석구석까지 찌겠다는 선전포고처럼.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오동통한 허벅지와 팔을 잡고서 나는 하이파이브를 해보곤 했다. 튼실한 허벅지도 사진첩에 고스란히 저장했다. 허벅지가 닭다리 같기도 하고, 버둥대는 게 귀엽잖아!
사진첩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던 신기함은 밤중 수유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유할 때 가끔 공포감에 휩싸였다. 작은 사람은 최근 새벽마다 분유를 거부하고, 강성 울음으로 울었다. 어둑한 거실 소파에 앉아 작은 사람을 안은 채 전전긍긍했다. 어느새 안아주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워진 체중에, 활처럼 허리를 휘면 나는 작은 사람을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상체를 뒤로 젖히는 기이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잠시 진정된 작은 사람. 수유 시작은 폭풍 전야였다. 혹시 분유가 사레들릴까 걱정하고, 거친 들숨과 날숨에 움찔댔다. 평소 대범한 편이었는데도 젖병을 쥘 땐 어깨와 손목이 경직됐다. 작은 사람은 분유를 잘 먹는가 싶었는데 이내 혀로 젖꼭지를 밀어냈다. 아, 이러면 오늘 하루의 시작이 좋지 않은데. 수유 텀이 엉키겠네. 온갖 잡념이 머리에 꽉 찬 와중에 작은 사람의 튼실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분유를 별로 먹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살만 찌는 거야!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춰 젖꼭지 단계를 올려줘야 한다는데 나는 차일피일 젖꼭지 바꾸길 미루고 있었다.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분유를 먹을 때마다 토하니까. 눈물을 흘리니까. 혀로 젖꼭지를 밀어내니까. 혹시 지금보다 더 적게 분유를 먹을까 봐. 이날 이후 크게 마음을 먹고 분유가 좀 더 빠른 속도로 나오는 젖꼭지로 바꾸기로 했다. 작은 사람의 기분이 가장 좋고, 움직임이 활발한 오후에.
작은 사람은 분유를 남기지 않고 한 번에 원샷했다.
신기했다. 매번 분유를 남기던 그 아이가 맞나. 잘 먹어서 다행이었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시간을 달리는 아이는 이미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데, 내가 변화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 변화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분유를 먹이고, 재우고, 달래고, 놀아주는 시간이라는 문 앞에서 내가 '가능성'이라는 문고리를 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매일 똑같은 육아의 세계가 조금 달리 보였다.
갑갑한 집안에도 최초의 모험이 숨어있었다.
“이거 봐. 에어컨이야.”
작은 사람을 안은 채 이렇게 말하면 에어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작 세상에 태어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아기가 에어컨을 정말 제대로 아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언어를 건네며 작은 사람이 모험을 떠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것. 에어컨, 창문, 하늘, 침대, 냉장고, 욕조, 거울 등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이러한 작은 것들이 모여 변화와 가능성의 집합체가 되지 않을까.
아이와 씨름한 한 주의 끝에 가끔 육퇴의 기쁨인 맥주를 마신다. 시원하게 한 잔을 들이키며 남편과 나는 작은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나누다가 서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말끔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붕붕 떠다니는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조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말했다. 육아에 뛰어들면서 스스로 한계를 규정짓는 동시에 어떤 가능성을 품기 어렵다고 단정한 것 같다고. 이건 비단 작은 사람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는 걸.
“설마 내가 되겠어.”
타인을 응원하거나 관대해지려고 애썼지만, 내게는 각박하게 굴었다. 무슨 일이든 쉽사리 시작했지만, 나라는 사람이 정말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딱 잘라버렸다. 오히려 치열한 사회 속에서 이제 멈춰도 괜찮다고, 쉬어가기를 권하는 흐름에 나를 맡기는 쪽을 택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야’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자신을 회피하는 쉼은 게으름에 불과하다. 맥주를 마시며 내일을 가늠해본다. 아이를 돌보는 매일은 비슷하지만 나는 변화할 준비가 돼 있다. 쉼보다 치열함에 뛰어들고 싶다.
나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공허함과 불만족은 삶의 불가피한 부분일 뿐 아니라 유용한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시선을 지그시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다. 허기는 비록 불편하기는 해도 연료와 비슷하다.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며, 그 작은 걸음마들을 하도록 힘을 주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새로운 영토로 우리를 떠밀어주는 것이다.
- 캐럴라인 냅, ≪욕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