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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n 28. 2022

'꺼억' 트림하는 너의 조그만 등을 보면 말야

아이 돌봄 시작 : 트림에 관해 

일정한 리듬감을 타며 작은 사람의 등을 두드린다. 톡톡톡. 아기를 어깨 쪽으로 들어 올려 왼편 등을 톡톡 두들기거나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린다. 작은 사람은 속이 불편한지 계속 꿈틀거리는데 트림 소리가 잠잠하다. 작은 사람을 다시 오른 허벅다리에 앉힌 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상체를 조심스레 지지하고서 등을 재차 두드린다.      


툭 툭 툭.      


들썩들썩 움직이는 작은 등. 미간을 찌푸린 채 바둥거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 날은 숨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날은 성인보다 더 크게 ‘꺼억~’하고 소리를 내며 트림하고, '뿡'하고 방귀를 뀌어 놀라움(!)을 선사한다. 트림한다고 뒷덜미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힐 정도로 애쓰다 보면 왈칵 토를 할 때도 있다. 그러다가 다시 꺽꺽거리며 트림하고 나서 세상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저, 깨우지 마세요. 지금이 딱 좋거든요.”      


내가 남의 등을 이렇게 쓸어내려본 경험은 대학 초년생 때 술 취한 동기의 등을 두드려준 적 외엔 거의 없었다. 아기의 등은 어찌나 작은지 모른다. 나의 두드림에 여물지 않은 내장이 반응한다는 게 신기하다. 


고작 분유 먹는 일처럼 보였는데 맘 카페에 가면 나의 태도를 재정비하게 된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젖병이 아이한테 맞지 않아요.”, “공기를 많이 먹었어요.”, “흡착 방지 방법 뭔가요?” 등이 단골 고민이다. ‘올바른 수유 자세와 트림 방법’을 소개한 유튜브 조회수가 높은 걸 보면 새삼 아기의 등이 달리 보인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엄마와 아빠들이 아기의 등을 두드리고 있는 걸까.      


낑낑대며 트림하려고 애쓰는 아기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등이 이렇게 작아도 되나?”      


평일 낮, 없는 시간을 간신히 쪼개 동네에 있는 육상 트랙을 경보하듯이 걷는다. 트랙을 돌 때마다 근처에 위치한 유치원 놀이터를 지나간다. 유치원생 아이들은 놀이시간인지 서너 명씩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하거나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계단을 줄지어 올라가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고사리손으로 모래를 자기 앞쪽으로 끌어모으는 아이의 뒷모습이 참 조그마했다.     


 “제 발로 걸을 정도로 큰 애들인데도 등이 어쩜 저리 조그맣담?”     



얼마 전 엄마는 외할머니가 서울에 오셨을 때 백화점을 가셨다고 했다. 구부정한 허리, 성하지 않은 무릎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든 넘은 노인. 할머니는 ‘입을만한 옷’ 대신 ‘입고 싶은 옷’을 사고 싶은 눈치였다고 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뭐 입고 싶은데?” 발목까지 늘어진 원피스를 입고 싶다는 할머니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엄마는 ‘불편함’, ‘실용적이지 않은’ 이런 게 떠올랐지만 결국 할머니가 입고 싶은 걸 사드렸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운이 넘치던 할머니는 요새 아이처럼 낮이고, 밤이고 꾸벅꾸벅 잠만 주무시는 게 마음에 걸려서. 이날 할머니는 백화점에서만큼은 원피스를 고르느라 엄마보다 앞서 걸었다고도 했다. 


트림하려는 조그마한 등, 예쁜 원피스를 입은 나이 든 등을 떠올린다. 둘의 뒷모습은 내게 이상한 마음을 실어온다. 어린 등과 늙은 등 모두 만져주고 싶다. 앞으로 겪어가야 할 일들이 선명하게 보여서, 이미 지나온 길의 풍파가 짙게 느껴져서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뒷모습이라 마음이 쓰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분유 먹이고 등을 두드려주거나, 원피스를 살 때 약간 보탬이 되는 용돈 정도다.      


대체로 앞모습보다 뒷모습에 흔들린다. 꾸밀 수 있는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무방비 상태니까. 나도 그렇지만. 우리는 앞을 꾸미고, 꾸미지 못한 뒷모습을 달고 걸어 다닌다. 가끔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때 어떤 사연이나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 감정에 치우친 오류가 대부분이겠지만, 가벼움, 무거움, 고됨, 나른함, 무력함 등 그를 나타내는 기운이 간혹 꼬리표처럼 뒷모습을 통해 삐져나오는 것 같다. 앞모습은 밝지만, 뒷모습은 그늘질 수 있다.      


이런 순간이 하나씩 쌓일수록 잠깐 결심해본다. 

앞보다 뒤를 바라보자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기를 주저하지 말자고.      


분유를 다 먹고 만족한 얼굴로 ‘헤~’하고 입을 벌린 채 잠든 작은 사람의 얼굴을 깊이 바라보면서 트림한다고 끙끙댔던 등허리를 손끝으로 만져본다. 


내 손바닥으로 절반 이상 가려지는 등허리를 가진 작은 사람이 점차 나이를 먹더라도 계속 쓰다듬거나 두드려주고 싶었다. 돌봄 노동이라는 피곤함에 절어서 만남을 미룬 외할머니를 다시 만나면 굽은 등을 쓸어내려 드리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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