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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무지니 Feb 02. 2023

매서운 추위 다음은 따뜻한 봄날이 오기도...

회사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롤모델의 등장 


지난 글에 이어서... 


그러고 다시 출근을 하니, 내가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아있어야 하는 회의가 들었다. 자료 만들면서 글자색이 쨍한 파란색인지, 조금 연한 파란색인지, 문단의 위치가 1mm 벗어났는지 아닌지로 십수번은 다른 버전을 만들어야 하는 자료 만들기도 너무 힘들고 고단했다. 


사람이 점점 어두워지는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었나보다. 그래도 우리 부장님은 몰랐다지? 


"야무진선임, 팀장님 면담 한번 해볼래? 우리 팀장님 깨어있는 분이라 이야기 잘 들어주실거야" 

그 때 당시를 생각해보면, 이제 막 선임이 된 내가 굳이 상무를 만나서 이야기할 일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물론 업무의 특성상 임원분들과 회의를 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좀 겁이 나기도 했다. 회사에 임원이 그리 많지도 않던 때였으니까. 


"그래,  무슨 일로 면담을 요청했을까?" 

웃는 게 시원시원하셨고, 목소리가 참 조용조용하셨다. 지금이 아니면 도무지 기회가 없을것 같아서 다시 엔지니어가 하고 싶다고 했다. 선임, 그것도 고작 1년차 겨우 넘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해야 하는 책임감이 너무 힘들고, 이것저것 일이 너무 많으니 뭘 배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한참을 하소연했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를 이야기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 일/주/월별 보고서가 38개라는 자료 정리해가지고) 


"그래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부서로 가고 싶습니다."

"그건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일이 아니야. 야무진선임이 갑자기 다른 데로 가게 되면 원소속 부서장과 가게 될 부서의 부서장과의 마찰이 생길수도 있고, 야무진 선임에 대한 평에도 좋을게 없어.우선 부서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사실 부서를 옮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 팀 산하에 있는 하위 조직이었으니 나같은 선임 하나 이동하는 건 인사팀을 거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팀장님은 차분히 설명해주셨다. 앞으로 계속 일해야 할 건데, 당장 옮기는 게 답은 아니라는 조언과 함께. 

"이 건은 내가 부서장이랑 이야기를 할 거고,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 2주 안에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이야기해줄게. 그리고 그 때 다시 한번 이야기합시다." 


1차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1차라는 건 그 이후에도 꽤 여러번의 면담이 있었다는 거다. 

 

결국 하던 공통업무를 모두 내려놓고, 엔지니어로 다시 돌아가긴 했다. 그 업무 인수인계를 참 여럿이도 받더라. 조금씩 품앗이 했으면 될 일이었던 거다.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했더니 뭔가 이뤄진다는 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럼 너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지, 부서장 면담을 하면서 뭐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너는 내 심복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나쁜 x" 


그 이후에 노이로제가 걸려서 핸드폰 바탕화면에 빠른 녹음 어플을 설치했다. 누가 면담하자고 하면 빨간 간동그라미 누르고 들어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 부서에 있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내 입으로 나는 임원될거라 노이즈는 만들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노이즈는 커녕 상위고과 한번 못 받게 생겼더라. 


그래서, 팀장님 다시 찾아갔다. 


"엔지니어 업무로 다시 변경되었다고 들었는데, 또 무슨 일이 있어?"

"저 정말 부서 이동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면담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고, 무엇보다 저는 잘되고 싶은데 이 부서에서는 더 이상 잘 배울 수 있을 거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야무진 선임이 진짜 힘든건지 잘 모르겠어. 매번 싱긋 웃으면서 덤덤히 말하는데, 양쪽 다 확인해봐야 할거 같은데?" 


그말 듣자마자 주책맞게 집무실에서 펑펑 울었다. 사실 그간 팀장님과 몇차례 면담을 하면서 부서장은 팀장님에게는 잘 마무리됐다고 보고하고 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이 왕왕 있었다. 부서장 입장에서는 내가 계속 팀장을 만날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지, 잘 된 거처럼 보고했는데 번번히 걸리니 눈엣가시가 되버린 거였다. 눈물은 결국은 나에게 돌아올 약점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참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안으로 삭히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팀장님이 놀라셨다. 울릴 생각은 아니셨겠지. 


"그래, 힘들면 힘든 거 티내기도 하고 해야지. 알겠어, 나 지금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하는데 자리에서 진정 좀 하고 천천히 나가봐요. 이번 일은 부서간에 얘기해서 정리하는 대로 내가 다시 연락줄게" 


결국은 두 달 가까이 면담하고 조른 끝에 다른 부서로 이동을 했다.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오래 못 버텼을지도 모르겠다. 부서장 복이 참 지지리도 없었다. 매서운 서리같은 날이 계속 됐는데, 상무님과의 몇 번의 면담은 어둠 속에 한줄기 빛같았다. 회사 다니면서 배우고 싶은 롤모델이 없었던 내 인생에 첫 번째 롤모델의 등장이었다. (그 이후에 결국 다른 롤모델은 못 찾았다.ㅋ) 


1. 상무의 권한이 엄청나던 때였다. 일개 부장도 갑질이 넘쳐나던 시기에, 상무님은 나와의 약속을 한번도 잊으신 적이 없었다. 면담하고 나서 당신이 해주기로 한 조치가 어떻게 되 가고 있는지, 나의 상황은 어떤지 꼭 챙기셨다. 


2. 그냥 한번에 부서 변경이 훨씬 쉬운 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해버리고 나면 나한테 올 피해와 부서간의 이해관계(이건 뭐 팀장님의 걱정이실수도 있지만)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셨고, 충분히 설명해주셨다. 


쓰다보니 내가 글재주가 참 없는 가보다. 그 때 당시의 감동과 멋짐이 왜 표현이 제대로 안되는거 같지? 생각해보면 내 상황때문에 후광효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면담이라는 걸 별로 해본 적도 없고, 그나마 물어봐도 "별일 없습니다"말고는 안하던 내게 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해주시기도 했고, 진짜 관리자는 경청하고 신뢰를 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으니까... 


지금도 가끔 한번씩 뵈면 그 때의 일을 가지고 놀리시곤 한다. 


"쟤도 참 고집이 어마어마했어~ 왠만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결국 하고 싶은대로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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