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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Oct 16. 2024

부산의 다크투어, 기장 죽성

5월 23일의 산책

(사)부산여성문학인협회 기획도서 <부산 해안의 포구와 항구를 따라서>에 게재된 수필입니다.

5월에 쓰고 10월에 발표합니다.


  1592년 5월 23일. 부산진성 앞 바다는 왜선으로 까맣게 메워졌다. 듣도 보도 못한 굉음 소리를 내는 조총을 쏘며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을 막기에 조선군은 중과부적이었다. 사흘 만에 왜군은 부산을 접수했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다. 산책하기 좋은 오월이다.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선다. 오늘 내가 걸을 곳은 기장군 죽성리이다. 죽성은 죽성성당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진짜 가톨릭 성당이 아니고 2009년 SBS 드라마인 「드림」 세트장이다. 드라마는 저조한 시청률에 허덕이며 끝이 났지만, 죽성성당은 한국인·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푸른 바다의 끄트머리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빨간 지붕의 작은 건물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시원한 풍광과 아기자기한 건물을 누리는데 돈도 들지 않는다. 부산으로 오는 관광버스는 죽성성당에 여행객을 내려준다. 오늘도 대구 교회에서 온 버스와 일본인을 태운 버스가 나란히 서 있었다. 부산시민들도 바람 쐬러 나왔다가 찾기 좋은 곳이 죽성성당이다. 그동안 닫혀있던 내부는 새롭게 단장하여 기장의 명물을 소개한다. 전시된 사진들을 보니 낯선 이름도 보인다. 부산살이 십 년째인데, 모르는 곳이 있으니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든다. 다음에는 저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성성당을 보았으니 다시 길을 나선다.     

  야트막하게 보이는 죽성리의 뒷산을 향해 걷는다. 그곳에는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왜성이 있다. 밀물 밀려오듯 북으로 올라가던 왜군은 평양에서 조·명 연합군에 패하며 다시 썰물 빠지듯 남쪽으로 도망갔다.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왜군은 순천에서 울산에 이르는 남·동해안에 왜성을 쌓았다. 서른한 개의 왜성 중에 부산지역에만 아홉 개나 있다니 이 지역이 받은 핍박은 눈에 뻔하다. 한적한 두호마을을 지나 비탈을 올랐다. 이제 계단만 올라가면 죽성 왜성이다. 기대도 잠시 사유지인 죽성 왜성에는 울타리가 우리를 위협하며 빈틈없이 서 있다. 아쉬움에 기웃거리지만 송곳이 들어갈 틈도 없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일본인 할아버지 여덟 명이 차 두 대를 나눠타고 와 있었다. 이미 입구가 막혀서 못 올라갈 줄 알았듯이 주차장에서 왜성만 바라보신다. 그래도 혹시나 연로한 분들이 도전할까봐 막혀있다고 이야기하니 아쉬운 눈길을 죽성 왜성에 한 번 더 두고는 차를 타고 떠나셨다. 언젠가 부산·기장 역사에 정통한 향토 사학자 선생님께 들었던 적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의 흔적을 잘 찾는단다. 그들의 다수는 사죄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일본인 할아버지들의 얼굴에서 당당함보다 겸손한 미소를 본 듯하다.     

  쿠로다 나가마사는 33,000여 명을 동원하여 죽성 왜성을 축성했다고 한다. 왜군이 사용한 돌은 근처에 있는 두모포 진성의 돌이다. 우리의 것을 해체하여 왜성을 쌓았다. 또 2,600여 평이나 되고 해자까지 있었다던 왜성을 쌓은 이들은 미처 피란하지 못한 조선의 백성이다. 왜군은 1598년까지 이 땅에 눌러앉았다. 정유재란 때는 잔인한 가토 기요마사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칠 년간 조선 백성이 겪은 고통은 미루어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조상들의 질긴 투쟁 끝에 우리는 자유를 얻었고, 오백 년이 훌쩍 넘은 지금은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임진년 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억압받은 조상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쩌면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사유지란 이유로 울타리가 처져 있어서 성까지 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성 밖에서라도 죽성 왜성을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일본인을 태우고 온 운전 기사는 우리를 보며 신기해했다. 일본인 할아버지의 발걸음보다 우리의 행보에 더 놀란 것은 아마도 죽성 왜성을 찾는 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죽성 왜성을 바라보며 나는 일본인 할아버지와 운전 기사와 따뜻한 눈길을 나누었다. 지금은 전쟁의 흔적은 사라지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 되어 텃밭과 사람 냄새나는 곳이 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우리의 아픈 역사의 장소임이 틀림없다.     


  비극적 역사 탐방(Dark Tourism)은 1996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세계적으로 독일의 아우슈비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미국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4·3항쟁의 제주, 광주민주화운동의 광주,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울 등이 대표적이고, 부산에도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나 가덕도 포진지, 동래읍성 등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지만, 왜성도 비극적 역사 탐방을 많이 와서 우리 조상들의 고통과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가짜 죽성성당 말고 진짜 죽성 왜성 말이다.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 나온다. 죽성성당에는 여전히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다. 갈맷길을 따라 더 걷다 보니 ‘두모포 풍어제터’라고 쓰여 있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너머에 ‘어사암’이 보인다. 고종 때 굶주린 사람들이 바다에 침몰한 배의 곡식을 건져 먹어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이를 구제한 것이 어사 이도재였다고 한다. 어사암에서 만난 갈매기를 벗 삼아 더 걷다 보니 어느새 대변항이다. 대변의 용암초등학교에는 신미양요 직후에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있다. 죽성 왜성과 척화비. 이질감과 동질감이 같이 느껴진다. 한바탕 걸었더니 등에 땀이 한 줄기 흐른다. 이제 곧 여름이 오는 듯, 햇볕은 따갑고 바람은 시원하다. 파도 소리에 눈길을 돌리니, 파란 바다에 하얀 거품이 이는 모습이 마치 백마가 달리는 것처럼 나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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