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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by 지니삼촌 Mar 16. 2025


그네를 다.

허공에 두발을 띄운 채  그네를 다. 공중을 미끄러지듯, 얼굴에 닿는 한 바람결 무척이나 다.


삐그덕 네를 따라  오가는 동안, 우리는 현실에서 과거로, 다시 또 현실에서 미래를 슬며시 넘나들고 있었다.


언제나 실을 노라 만, 과거와 미래를 그네처럼 무수히 가며 오늘을 관통하듯 살아간.


현실 속 런저런 으로 한 후, 때론 위로를 거로 선을 돌리거나, 알지 못하는 불안감으로 미래를 심스레 더듬 다.


완전한 개미, 완전한 꿀벌은 있지만 인간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에릭 호퍼는 이런 사람의 "치유할 수 없는 불완전함"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점이라고 했다. 완벽함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이지 못하며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다.


인간은 이런 불완전한 한계 앞에서 행동을 멈춘 채 해결을 모색하는 고뇌시간이 필요하다. <치유할 수 없는 불완전함>람을 깊이 사색하게 만기에 오히려 <인간적인 조건>이 된다고 호퍼는 말한다.

 

완벽함을 위해서 주춤거리고 성가신 <인> 깡그 제거해 버린 오늘날의 세상은 기계적이고 비인간적변질되어 버렸.

 

가끔씩,  스마트폰 창위로 래된 과거의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럴 때면 설고 생경 느낌에 놀란다. 금보다 훨씬  젊은 내 모습과 가족들 습이, 련한 망각의 강을 어 성큼 추억으로 되살아나 왜 이리도 지독스레 낯설기만 한 걸까.

 

세월 흐르고 흘러  되고 팔십 되면 지금의  모습 역시 생소해지리라. 


낯섦이란 <단절>에서 생겨나는 허기진 갈증처럼, 눈앞에 펼쳐진 결이외에는 시선조차 돌리못하고 사는  실상을 일깨우는 고성 느낌은 아닐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10대, 20대, 그리고 60대 이후의 나 자신이 산산이 조각난 파편처럼 각기 다른 낯선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었다.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변하지 않는 내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은 그중에 디에 담겨 있을까. 


그네를 탄다.

산산이 분산된 내면  많은 낯선 존재들을 그네의 궤적을 따라 오가며 나씩 낚아채듯 꿰어 맞춘다.


하이라이스를 먹었다.

가족과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김이 모락거리는 저녁식탁 위에서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과 함께 하이라이스로 식사하던 순간이 생각나면서 나 홀로 울한 그리움 속에 빠져버렸.


작가 '비비언 고닉'은 여느 때처럼 아파트 거실 테이블에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남편 존과 함께 막 앉았다. 순간 남편이 '광범위 관상동맥 혈전'으로 쓰러지고 사망했다.  


감각적이고 도도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광을 받던 작가였지만, 녀는 한순간에 변해버린 삶 앞에서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아주 오랫동안 멈추어 버렸다. 


죽음이란, 영원한 헤어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제로 험한다은 전혀 다른 차원다.


그저 죽은 남편이 다시 되돌아오리라 믿으며, 남편이 쓰던 신발과 옷가지들을 예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놓아둔 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다.


삶은 빠르게 변한다.

삶은 순간에 변한다.

저녁을 먹으러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알던 삶이 끝난다. 자기 연민이라는 문제.  < 비비언 고닉의 '상실' 중에서>


내가 알던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려 무수히 <마법적인 사고>를 하며 잔인하게 돌변해 버린 삶에게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과는 파괴적인 자기 연민만이 흘러 넘 칠 뿐이다.


상실로 인해 깊이 베인 비애의 상처에 어떠한 처방이나 위로도 소용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수없이 많은 먼지처럼 쌓여서 찌든 흔적이 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친근하고 편안한 감정만이 기적처럼 치유가 가능케 다.


급변하는 거친 삶 앞에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들은 한낱 먼지처럼 덧없어 보인다.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조각들이다.


이른 새벽마다 졸리고 지친 몸을 일으킨다. 가족들과 함께 마실 물과 음료를 준비하고, 난로를 피우고, 아내와 장보기, 택배를 마친 후 아내와 아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누던 이런저런 대화들. 그리고 그런 우리를 비추어 주던 한없이 크고 노랗게 빛나던 보름달.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런 일상의 조각들이 급변하는 삶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남겨놓은 크고 작은 폐허 속에서 견디고 버티게 한 물과 양식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믿기지 않지만 이미 노안으로 산다. 택배송장 위 자잘한 주소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시(斜視). 노안일 때는 송장을 (곁눈질)로 봐야 제대로 보인다는 아내의 말에 빵 터졌다. 아들이 만든 랩송에 맞춰 곁눈질하며 택배춤을 추는 아내를 보며 눈물 나게 웃었다.


살면서 곁눈질하듯 모로보고 비스듬히 바보면 죽을 것 같이 힘겹던 순간이 그래도 살만해진다.


인생이 불완전하고, 삶이 어느 순간에 돌변해서 내가 알던 일상을 송두리 채 빼앗지를 누구도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또 그렇게 말이다.


나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I know not what tommorow will bring). 


'페르난두 페소아'가 남긴 마지막 문장처럼 어쩌면 완전한 삶이란 완벽한 포기를 꿈꾸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네를 탄다.

디딘 두발에 힘을 뺀 채 삶의 흐름에 맞춰 기꺼이 나의 전부를 내맡긴다. 삶의 파편들을 품으며 완벽한 나날을 꿈꾸며,


삶은 늘 그렇듯 그네처럼 임없이 오고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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