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가 되어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중간중간의 사건들은 알아도 진지한 이혼은 전혀 예상 못하시던 부모님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하고 싶다고,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던지고 잘 준비를 했다. 사실 딸이 이혼하는 것은 무섭고 부담스럽지만, 남편이 나에게 한 행동들을 속속들이 아시면, 그리고 내가 그 상황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게 되면 결국은 내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부모님일 것이다.
자는 내내, 선잠 속에서조차 이 상황이 무엇인지, 내가 잘못한 것이면 어쩌지. 낯섦과 죄책감을 오가며 괴로워했다. 친정에 있을 때의 단점은 그런 마음을 내보일 수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하는 것이고, 장점은 마음을 감춰서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덜 무너질 수 있다. 죽기 직전까지 에너지를 쓰더라도 지금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음 날, 남편으로부터 아침부터 연락이 왔다. 협의를 하자고 한다. 우리는 협의가 필요 없고 당신이 양육권만 양보하면 되는 거라고 하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대답은 한결같다. 그럼 도대체 뭘 협의할 건데?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협의를 하자는데 아직도 솔직히 알 수가 없다. 정상적이지가 않다.
그는 이혼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짐부터 빨리 빼라고 윽박을 질렀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결할 마음은 애초에 없다. 빨리 집을 어머니께 돌려 드려서 전세를 놓으시게 해야 자금이 돈다고 하는 말이 어제도 나왔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 때문에 쓸데없이 우리 어머니 돈이 낭비되고 있다. 는 뜻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다르게 들었어야 하나. 정말 내 피해의식 때문인가. 하지만, 네가 지금 이 집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아냐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난 알고 싶지도 않고, 모르겠다. 내 영역이 아니라서 감당이 되지 않는다. 오전 내내 돌팔매짓하듯 통하지 않는 기분 나쁜 문자를 주고받는 와중에
"너 혼자 등하원시킨다고 불만이 많았지. 오늘은 내가 어린이집으로 갈 거야"
하는 문자에 얼어붙어버렸다. 남편은 한 번도 혼자 아기를 찾은 적이 없었다.
이미 지인이 진행했던 이혼소송의 변호사와 상담예약을 잡아놓긴 했었지만 그건 3일 후였다. 남편이 아기를 데리러 가겠다고 하니 놀라서 변호사에게 문자를 보냈고, 내가 덜덜 떨며 친구와 통화하는 잠깐 사이에 안면도 없던 변호사는 전화를 몇 통이나 주었다. 빨리 전화를 달라는 다급한 문자를 보고 어리벙벙한 상태로 번호를 누르니 첫마디가 절대로 아이를 뺏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혼소송을 시작하면 임시양육권자 지정이란 것을 한다. 그리고 실무상 임시양육자는 99% 주양육권자가 된다. 그런데 법원은 보수적으로 판단하므로 임시양육자 지정을 할 때 앞뒤사정을 보지 않고 지금 현재 아기를 누가 데리고 있느냐만 본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를 절대로 남편이 데려가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아빠가 다니던 어린이집 앞으로 찾아오거나 길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나 아기를 힘으로 빼앗아 가는 일은 부지기수이므로 당장 아기를 집안에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어린이집까지 갔던 길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기를 안고 몇 번을 휘청거리는 다리를 바로 세워 집으로 데려왔다. 연수를 받는 기간이라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했는데 갑자기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당장 아기를 지켜야 해서 멍하니 있거나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변호사와의 약속을 당장 오늘 저녁으로 바꾸고, 아기얼굴을 보며 숨을 고르는 중에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00 이를 찾았다고 한다.... 거기서 다시 한번 놀라 부서지는 마음을 간신히 바로 잡아 어떤 목소리였냐고 물으니 딱딱한 할머니 목소리였어요.... 딱딱한 할머니 목소리란 제대로 어머님인데...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어린이집에서 알려준 수신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는다. 여러 번 걸어보다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뒷자리 번호가 같은 교대역 근처 법률사무소 번호가 나왔다. 이혼 형사소송 전문이라고 쓴 변호사 홈페이지를 보며 심증은 굳어졌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급히 와서 떠먹여 주는 첫 끼니를 먹으며, 내내 울며 연수를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할 용기도 여유도 없었다. 일단 빨리 변호사를 만나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게를 하시는 친정부모님께 이른 퇴근을 부탁해서 6시경 아이를 맡기고 교대역으로 간다.
전철로 집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꽤 먼 거리를 단숨에 도착했다. 빨리, 빨리 가서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아기를 뺏길 수 없다. 여태 괴로웠는데 이대로 놔둘 수 없다. 어떻게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복잡한 골목을 지도 어플을 켜고 무작정 걸었다. 변호사 사무실은 간판도 크지 않아서 여러 개의 건물을 들락날락 거리며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통화했던 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래된 벽과 책상, 소파만 있는 멋없는 방에 들어서 물을 한잔 마시고 손을 덜덜 떨며 들었던 변호사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아기의 나이가 어리고, 주 양육자가 나이므로, 100프로 승소할 수 있다. 다만 양육권자 지정이 날 때까지 아이를 무조건 지켜야 한다. 심부름센터를 써서 엄마와 아기를 미행하는 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빼앗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 그렇게 아기를 빼앗기면 확률이 뚝 떨어지므로, 그리고 절차가 아주 복잡해지므로. 당분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눈에 보이도록 아기를 데리고 있어야 한다.
상담료는 10만 원. 수임료는 550만 원. 남편의 재산에 가압류를 하게 되면 추가 30만 원. 그 외에 자잘 자잘한 소송에 필요한 비용들이 첨가될 것이라는 것.
기간은 최소한 1년이 넘을 것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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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엄마의 경제력은 양육권자 지정에 큰 영향은 없다고 해요. 아이의 나이와, 현재 양육자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변호사는 오히려 엄마가 경제력이 없다면 양육비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혼은 현실이기에, 양육권자 지정이 되고, 양육비를 받기까지 버틸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경제력이 없다면, 이혼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