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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일기(5)

사건본인

by 도미니



소장은 변호사가 쓰지만 그 내용은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제출하는 이혼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혼스토리를 빨리 낼 수록 소송이 빨리 시작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당장 써야 했다. 연수를 들어야 하는데 연수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이번 주는 온라인 연수로, 노트북에서 계속 열심히 떠드는 교수님들께 너무너무 죄송하고 정말 죄책감이 산더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연수를 받는 동료들이 즐거운 농담을 주고받는 단체카톡방도 나와는 너무 먼 이야기였다. 눈물은 줄줄 흘러도 ^^과 ㅋㅋ을 간간히 띄우며, 최대한 가능한 만큼 티 내지 말고 잘 있어보자. 그것 또한 연수기간의 목표이기도 했다.


아픈 기억은 되살려내는 것조차 고통스럽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썼다. 지금도 사실 시간이 지나며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정말 많은데 그게 나은 건지도 모르겠고 중요한 얘기인지도 모르겠어서 다만 가만히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뜨게 마련이다. 법원에서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 위해서 지금, 고통을 무시하고 애써야 한다.


결혼과정과, 결혼 이후의 생활, 이혼 결심의 이유 등의 항목에 따라 5장에 걸친 이혼스토리를 써서 내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서류들이다. 요즈음은 동사무소를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는 데 정말 복잡하다.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뽑다 보면 서류목록을 보고 직원들이 이 사람 이혼하는구나... 를 다 안다고 해서 사실 인터넷 발급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순간 창피하고 동사무소에 갈 것을 그랬지... 하필 만료돼버린 공인인증서를 다시 발급받고, 대법원 사이트와 정부 24를 오가며 어떻게든 받아보았다. 정말 복잡하게 몇 번이나 사이트를 들락거려서 서류를 받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서 다시 한번 첨부하는 과정은.


정말 욕 나오게 힘들다. 난 이런 것을 못한다. 컴퓨터를 못하고 서류 작업을 정말 못한다. 시험을 볼 때에도 원서접수 자체가 시험 보는 것만큼이나 버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글을 쓰는 것.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지 있는 양식에 따라 무엇을 하는 것은 정말 정말 못한다. 이래 가지고 어디에 쓰나. 이래서 넌 이혼도 못하는 거야.라는 소리를 몇 번을 되뇌었다. 안 그래도 연수를 받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괜한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눌려 있었는데, 이런 어려운 과정이 있다니. 게다가 그 일이 모두에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멍청이라 잘 못하는 것이라.. '그 봐라 내 그럴 줄 알았지. 괜히 시작했지? 너 정말 큰 일어났구나?' 하는 알 수 없는 비웃음이 들리는 듯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올해 들어 남편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도 입술 깨물고 내가 혼자 해와서. 남편에게 나 이런 거 못하니까 대신해 줘.. 라며 무엇을 부탁한 적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아쉽지가 않았다. 할 수 있다. 그저 지금 어려운 시기니까 이런 것뿐이야. 할 수 있어. 여태 잘 살아왔잖아. 큰 문제없었잖아. 정신을 차려보자. 차려보자.


1) 서류 발급을 받고 2) 저장을 한 다음 3) 출력을 한다. 4)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그것을 다시 5) 메일로 보내고.


이걸 알기까지 시간이 하루종일 걸렸다.


1. 어디에 가서 받을 수 있는지 검색하고, 도대체 사이트 어디에서 받아야 하는지. 왜 가족관계 증명서는 찾을 수 없는지...- 가족관계증명서는 대법원사이트에서 가능하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정부 24.


2. 잘못해서 여러 번 저장한 것을 모두 파일을 열어 확인하고 삭제하고, 다시 이름을 바꿔 저장하고. 사이트에서 바로 캡처해 보내면 좋을 텐데, 공문서라 그게 안된다............. ㅠㅠ 일단 출력을 거쳐야 한다.


3. USB에 저장을 해서 쉬는 시간에 교회로 기어가 출력을 한다. 집에 프린터가 없다...


4. 핸드폰 카메라로 찍으려면 조명에 가려 그림자가 생기니 조절해서 여러 번 찍는다. 마음이 불안한 상태이니 손이 떨려 또 여러 번 찍어야 한다.


무너지려는 가슴을 몇 번이고 부여잡으며 내 것과, 남편 것을 다 하고 과호흡으로 괴로워하며 사이다를 하나 땄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아이 것을 보내야 한다고 한다. 아... 변호사가 준 서류 목록에 "사건본인"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우리의 이혼소송은 양육권에 대한 것이라 사건 본인은 피양육자인 '아이'였다.


사건본인인 아기 것을 떼려니 이제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서러움이 몰려왔다.


어제 아기를 찾아오고 소송을 알아보며 정말 힘들었던 것은 아기를 인질로 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얘는 그냥 우리 아이인데, 그저 정말 소중한 우리 아기인데 이런 아이를 데리고 누군가가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 거지 같은 소용돌이의 중간에 우리 아기가 있고, 그런 분란을 내가 만든 것만 같아서 불편하고 속이 상했다. 이런 와중에 아기를 기준으로 서류까지 떼려니 죄책감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모자란 두 어른의 감정다툼에 아기가 들어있었다. 아기를 중심으로 멍청하고 사납기만 한 짐승 둘이 대치 중이다. 내가 우리 아기를 이런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빨리 임시양육권자지정을 받아야 나도 일을 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일을 해야 아기를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빨리 소송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사건본인의 폴더를 따로 만들고, 위의 과정을 다시 반복해서 서류를 다운로드하여 저장했다. 이번에는 쉬는 시간을 기다릴 여유도 없어 온라인 강의창을 띄워놓고 대책 없이 밖으로 나가 서류를 출력하여 사진을 찍고 다시 저장해서 메일을 보냈다.


오늘 안으로 보내야 내일이라도 당장 소장 접수가 가능하다. 빨리 해야 했다.


이혼스토리와 서류를 보내고 나니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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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서를 굳이 출력하여 사진 찍지 않고, PDF로 출력. 을 선택했다면 간단한 것을. 저 때는 그런 방법을 몰랐었어요. 이게 아마 이혼서류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누군가에게 정말 이 방법뿐이냐고, 불평도 하고 물어보기도 했을 텐데. 그만큼 민감하고 어느 정도는 숨기고 싶은 일이다 보니 저렇게 무식하게 일처리를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런저런 실수와 모자람들을 보완하며 그래도 바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에 감사한 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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