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니 어린이집으로 전화해서 아기를 찾았다던 번호가 생각이 났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전화를 여러 번 걸어보았지만 도무지 받지를 않았었다. 전화번호로 검색을 하다 보니, 뒷자리 네 자리가 같은 이혼전문 변호사사무실의 번호가 나왔고, 아.. 어머니가 변호사를 찾아가서 그 변호사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거였구나..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상황의 전개였다.
이제 이틀이 지났으니, 누구라도 전화를 받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걸어도 받지 않는다.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안 받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다가 왜 어린이집에 전화해서 우리 아기를 찾았던 거냐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문자를 보내니 연락이 왔다!
.... 결론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
어린이집 일자리를 구하는 분이 전화를 걸어서 원장님을 찾았던 것이었고, 애정이 있는 아기가 위기에 처했다는 상황에 놀란 원장님과 선생님이 그걸 아기를 찾는 전화로 오해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분 목소리가 딱딱한 할머니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하긴 당황하셨을 텐데 뭐인들 멀쩡히 들리셨을까. 하지만 정말 공교롭게도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순간 그런 콜라보가 나왔는지 그것 또한 신기할 지경이다.
아무튼 전화는 어머님이 아니었고, 아기를 그쪽에서 그렇게까지 뺏어갈 수도 있다는 예상은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나는 혼자 덜덜 떨다가 소송까지 제기한 꼴이 되어서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원장님과 선생님들 원망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좀 더 신중하시지.. 왜 없는 말까지 만들어서 생각을 하셨을까. 분명히 아기 찾는 전화가 딱딱한 할머니 목소리로 왔었다고 카톡을 남기셨는데, 결과적으로 아기를 찾았던 것도 아니고 할머니 목소리도 아니지 않았는가. 사실 그대로만 전하셨어도 좀 더 상황판단을 했을 텐데... 순간 소송을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다시 몰려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차피 남편과 같이 살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가 된 지 오래였다. 어쨌든 이혼은 해야 했지 않은가. 이혼을 안 하고 또 이 상태를 질질 끌면, 난 이혼을 할 만큼 아프고 힘듦에도 이건 그냥 부부싸움에 불과했다. 지겹고 흔한 부부싸움 이야기는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한다.
이혼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협의이혼이었다면 아기만 받고 나왔을 것이다. 남편이 완고하게 굴 땐 양육비도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재산분할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말 그때 합의를 보는 것보다 지금 모든 상황이 더 나아 보였다.
어영부영 괴로움과 확신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중에, 변호사로부터 소장이 도착했다. 법원에 접수하기 전에 완성본을 보여주는 절차인데, 소가로 재산분할 청구액이 적혀 있다.
2억 9천7백만 원, 양육비 월 100만 원.
적힌 재산분할액을 보니 가슴이 다 후련했다. 나에게 생활비를 줄 이유가 없다는 그의 이야기에 내가 아기를 안고 소리 질렀었다. 그건 법정에서 가려줄 것이라고. 내 가사노동의 가치는 법원에서 판사가 결정해 줄 테니까 넌 말하지 마. 네 말은 소용없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몇 배로 갚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액은, 소 제기시의 형식적 숫자일 뿐 다 받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저 액수가 찍힌 소장이 그에게 도착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넌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아내에게 20만 원 조차 못 준다고 버텼지만 두고 봐.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머니 재산 한 귀퉁이를 내가 헐어올 거야. 억울하고 아까워서 팔딱팔딱 뛰어봐. 그게 내가 바라던 바야.
사실 그쪽에서 아기를 뺏어갈 생각이 아직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가압류여부를 조금 고민했었다. 재산에 대한 집착이 강한 집이라 세금 등의 문제로 재산에 가압류가 붙었을 때 펄펄 뛰던 모습을 기억해서 무섭기도 했다. 이미 나와 상관없다고 하더라도 사실 갖은 욕을 듣는 것은 또 좀 억울한 것이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은 데쓰매치라는 것. 내가 죽거나 네가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나는 없던 기운까지 모두 끌어내 너를 죽여야 한다. 난 언제나 너를 끝장내고 싶었고, 지금 그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가압류 비용 비용 30만 원을 마저 보내고 모든 절차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됐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나는 그대로 진행만 할 뿐이다. 고민 따위는 필요 없고 사치였다. 주어진 일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