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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u Feb 06. 2023

글을 사랑한 소녀

책 『언어의 온도』

소녀와 소년을 만나다

문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이성과 감정의 영역을 나누어, 문학은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글을 좋아하여 인문대 진학을 희망했던 한 고등학생은 문학과 철학의 진로를 고민하다 철학과에 진학했고, 5년 동안 시와 소설과 산문을 끊은 채 논리와 이성의 영역에 파묻혀 살았다. 그 고등학생은 어느새 스물다섯의 여름을 맞았다.


참 힘든 여름이었다. 4학년이라는 불안과 금전적 압박, 외로움, 무엇보다도 여태까지의 공부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절대 진리에 대하여 탐구하는 서양철학이 무의미해 보였고, 매 방학 열 권씩 읽던 철학책을 채 두 권도 읽지 못했다. 물론 매일 아침 건설 현장으로 향하는 첫 차에 몸을 실을 때,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던 날, 글을 사랑하는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나에게 자신이 아끼는 시집이며 산문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그 시집에는 소녀의 온기가 배어있었다. 나는 밑줄을 긋지도 반박이나 의문도 하지 않으며, 오랜만에 책을 온전히 읽었다. 열일곱의 소년이 생각났다. 나는 8년 전의 일기를 펼쳐봤다. 그곳에는 여태 잊고 살았던, 글을 사랑하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그날의 온도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언어의 온도와 마주하다

서점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철학 코너만 돌던 나는 어느새 문학 코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문학 코너에 머물 때면, 여러 시집을 꺼내 들춰보던 소녀의 반짝이는 눈이 떠올랐다. 아는 작가도 별로 없으면서 나는, 여러 시집과 산문집을 뒤적이고 매만져 보았다.


언어의 온도.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인터넷 서점에 들르면 가장 먼저 뜨는 팝업창에 베스트셀러로 추천되는 책이었다. 한 손에 잡힐 듯한 작은 사이즈에 보라색 표지를 한 그 책은 제비꽃을 연상케 했다. 책을 들춰보았다.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어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주기도, 정서적 화상을 입히기도 한다는 글귀가 맘에 들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매 순간의 온도를 온전히 책에 담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였고, 나는 별 고민 없이 책을 샀다. 내 방 책장의 빼곡한 철학책 사이에 어색하게 보라색 책이 한 권 꽂혔다.


책을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적은 분량인데도 책을 금방 읽지 못했던 건, 책의 온도를 온전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표현, 지나칠 수 있는 묘사 하나를 곱씹어 다시 읽어보고, 읽고 나서 잠깐 멈추면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나는 여태 너무 뜨거운 말들만 내뱉어 온 게 아닐까

부끄러웠다. 이성에 매몰되어 논리를 따지고, 정답을 강요하며 남들에게 상처 주었던 지난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때는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았다. 논리로써 상대방을 압도했지만, 상대방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나와 설전을 벌이던 이들은 모두 가슴에 뜨거운 화상을 입은 채 돌아갔다. 화상을 입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책임을 모두 상대방에게 돌렸다.     

문학은 상대방이 아닌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였다. 내가 왜 철학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가. 여태까지 내가 취했던 방법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 언어의 온도가 문제였다.


나는 여태 너무 뜨거운 말들만 내뱉어 왔다. 이성, 논리, 사실, 과학과같이 뜨거운 말들은 강철을 녹여 더욱 단단한 무기를 만들어주지만, 늦은 저녁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목욕물 같은 역할은 하지 못한다. 나는 더욱 강한 무기에 집착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더욱 뜨거운 말로 무기를 두드려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나는 내 말이 더 뜨겁지 못함을 비관했다. 하지만 무기가 단단하지 않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럽지 못함이 문제였다.


사람의 마음은 따뜻함에 움직인다. 너무 뜨거운 말로 사람을 휘몰아치면, 자신을 보호하려 더욱 움츠러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조금 더 부드러웠어야 했다. 제비꽃작은 이 책이, 여태까지 내가 글을 대했던 모든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따뜻한 말, 따듯한 사람, 따뜻한 겨울

어쩌다 일을 하루 쉬게 되었다.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곤, 아직 덜 깬 눈으로 음악을 들었다. 부스스 일어나 늑장을 부렸다. 소녀가 옛날에 추천해 준 잔잔한 영화를 집에서 혼자 보고, 별일 없이 하루를 보냈다. 책장에 꽂혀있는 철학책에 먼지가 쌓여 있다. 옛날 같았으면 견디지 못했을 하루겠지만,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장마가 끝났다.


학기에 접어들자 나는 다시 바빠졌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해야 했고, 졸업 논문도 쓰기 시작했다. 철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예전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금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때로 지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그대로 두며 지냈다. 4학년 2학기, 가장 초조해야 할 시기지만 나는 매일 밤 느긋하게, 조용히 내일을 준비했다.


누가 추천해주지 않아도 이제 제목이 맘에 드는 시집을 골라 사고, 유명하지 않은 영화를 찾는다. 뜨겁고 강렬한 영화보다, 조용하고 따뜻한 영화가 좋아졌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시집의 같은 부분을 몇 번이고 들춰보는 취미가 생겼다.


목욕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터놓고 고민을 말하면, 괜찮다는 말로 상대방을 감싸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에 나는 턱없이 부족했고, 오늘도 내 말 한마디에 글 한 줄에 사람들이 데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고, 겨울에 접어들어 어제는 첫눈을 봤다. 소녀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책장에 어느새 부쩍 시집과 산문집이 늘었다.


추운 날씨, 가슴에 책을 품고 당신이 해준 말, 당신이 써 준 글을 되새긴다. 올겨울의 온도는 유난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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