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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묘 Oct 12. 2024

다시, 새벽 6시 25분


좌심실을 막고 있던 돌멩이가 하나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오랫동안 흐르지 않았던 피가 온몸을 돌아 손끝까지 휘감았다.


음식점에 가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면 말하곤 했다. ‘고맙습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에서 형식적으로 듣던 말 중의 하나였다. ‘고맙습니다.’ 


감정을 얹지 않고 흔하게 주고받던 고맙다는 말이, 나의 모든 걸 무너뜨렸다. 늘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 주던 남편의 손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햇살이 내리는 오후에 딸과 거실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그러다 하교하는 겨울이를 마중 나가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에 들르기도 할 터였다. 주말이면 반찬을 챙겨 아들 집에도 가겠지… 내가 끊어 내고 싶었던 그 일상이라는 걸,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호스피스 병동에 지내면서 하늘을 유독 많이 보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목욕실로 향하던 중 병동에 있는 천창을 발견했다. 복도를 따라 길게 이어진 천창이 좋았다. 운 좋게도 종합병원 별관에 자리한 호스피스 병동이 제일 윗 층이었다. 


침대를 움직여 602호 바로 앞 복도에 나간다. 복도 한쪽 벽에 침대를 딱 붙여 놓고 하늘을 본다. 간이 의자를 가지고 나온 남편이 햇살을 이불 삼아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어느 날은 비가 내렸다. 우둑우둑 천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좋았다. 온 얼굴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날만큼은 남편도 졸지 않고 오랫동안 빗방울을 바라봤다. 


“여보, 기억나? 우리 편의점에서 처음 만났잖아. 비 오는 걸 유난히 싫어했던 당신이, 우산 없이 편의점 앞에 서 있었지. 오늘따라 내가 우산을 함께 쓰자고 했던 첫 만남이 생각나네.”


나에게는 없는 우리의 첫 페이지를 상상했다. 


“우리 함께 살면서 당신이 그랬었지. 이제는 비 오는 날이 너무 좋다고, 내가 당신의 우산이라고.”


폭우 속에 혼자 버려진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던 내가, 우산이 되어주는 사람을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따뜻한 우산 속에서 빗소리를 즐기는 법을 배웠으리라.










감히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몇 주가 흘렀다. 진통제로 잡히던 통증이 제멋대로 날뛰곤 했지만 모른 척했다. 살아내고 싶었다.


늘 불운하다 여겼던 나의 삶에 딱 한 번 기적이 온다면, 여든의 내가 지난날 살아왔던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긴 시간 엄마를 간병하는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던 딸과 겨울이가 다녀 갔던 날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누워서 가족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참 따뜻했다. 참을 수 없는 격렬한 고통에 눈을 뜬 건 그날 밤이었다.


눈을 뜰 때마다 보았던 장면이 사진처럼 남아 있다. 흐릿하지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을 봤다. 거친 신음이 입 밖으로 마구 새어 나왔고, 마약성 진통제가 혈관을 밀고 들어왔다. 정신이 아득했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거칠고 익숙한 주름진 손이 땀으로 젖은 환자복을 갈아입혔다. 길고 긴 꿈 속에서 또 다른 꿈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인실로 옮겨졌다.


항상 들려오던 바이탈 체크 소리가 멀어졌다. 귓가에 속삭이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지만, 느껴지는 숨결 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목소리를 붙잡고 싶었다. 








온통 어두움으로 가득한 곳에 혼자 서 있다. 천국을 앞에 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너의 기쁨이 너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홀연히 사라진 베르길리우스를 보듯, 하얗게 변해버린 검은 지평선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한 발자국 내디뎠다.




삐비빅 - 삐비비빅 -


기억 속에 있던 그 알람 소리가 울린다.

새벽 6 25.

 













은방울꽃 꽃말

다시 찾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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