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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묘 Oct 05. 2024

신기루를 본 적 있나요?

다인실로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났다. 


눈꺼풀이 세상의 빛을 막고 있어도 아침이 온 걸 알 수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는 남편의 손길은 매일 아침 여전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내가 깨어 있다는 걸 다 안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보,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당신이 좋아하는 새털구름이 파란 하늘에 가득해.”


예전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리곤 한다. 남편의 말에 화답하듯 병실 창문으로 가득 펼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병실 침대에서 보면 창가에 비친 다른 건물보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인다. 그리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도 오롯이 느껴진다.


이내 다른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오더니 손과 발을 닦기 시작한다. 그런 남편을 바라본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내 쭈글거리는 손 주름 사이에 따뜻한 온기가 베인다. 물수건을 움켜쥔 남편의 주름진 손이 거칠다. 오랜 세월 우린, 굽이진 주름만큼이나 굴곡 있게 살아왔을 것 같다. 그럼에도 끝까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부부의 손을 바라본다.










여느 때처럼 봉사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병실은 조용한 오후를 맞이했다. 늘 듣던 바이탈 체크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번갈아가며 들렸다. 눈을 깜빡이 듯 감고 뜰 때마다 몇 시간씩 흘러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꼬물꼬물 손을 간지럽히는 겨울이 덕분에 정신이 맑아지고야 말았다. 


“할머니! 일어나 보세요. 겨울이 왔어요. 오늘 학교에서 팥 찜질팩 만들었는데 할머니 주려고 가져왔어요.”


겨울이가 온 병실을 헤집고 다닌 덕분에 적막하던 공기가 따뜻한 활기로 가득 찼다. 병실 옆 가족실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팥 찜질팩을 넣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던 겨울이가 말했다.


“3! 2! 1! 끝!”


2분 타이머가 울리자, 전자레인지 속 찜질팩을 호호 불며 병실로 돌아왔다. 뜨거운 팥 찜질팩에 다치지는 않을까, 조용했던 병실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강해가 겨울이를 뒤쫓았다. 


“할머니 뱃속에 나쁜 병이 살고 있대요. 그래서 할머니가 아픈 거래요. 겨울이가 할머니 배 안 아프게 찜질해 줄게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고사리 같은 손’이라는 단어가 형상화된 느낌이었다. 작고 고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찜질팩을 쥐고 있다. 두꺼운 이불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손이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혹등고래 같았다. 복수로 가득 찬 아랫배가 조금 불편했지만 떨쳐내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겨울이의 말대로 될 것 같았다. 뱃속의 나쁜 병을 다 없애줄 것 같은, 그리고 다 같이 병원 밖을 나서게 되는 그런 신기루를 봤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로 하루를 다 써버렸던 이십대의 내 하루는 지루하고 긴 터널을 걷는 것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속 같은 길을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출구가 점으로 빛났었다. 아무리 가도 그 끝에 가까워지지 않았던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요즘은 따뜻한 빛이 가득한 예쁜 길 위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만 걸어갈 수가 없다. 한두 발자국 걸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바라본다. 제법 큰 나무도 심어져 있고, 나무 옆엔 예쁜 꽃들이 가득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높고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얇게 지난다. 


내가 찾던 터널의 끝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엔 가족이 있었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다정한 말과 손끝으로 느껴지는 정성 어린 촉감으로 잠에서 깨곤 한다. 눈을 뜨기 전, 잠깐이나마 선명하게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여전히 여든의 할머니이기를.  


하얀 가운을 입고 회진하는 의료진이 침대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말소리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무서워하지 말라고, 우린 사람 같아 보여도 사실 천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며칠새 열이 좀 내렸고, 미뤄왔던 목욕을 하기로 했다. 간호사의 열 체크를 선두로 핑크군단의 목욕 준비가 시작되었다. 간호사는 주렁주렁 걸려 있던 링거를 정리하고 방수패드를 부착했다. 나의 몸 곳곳을 찌르고 있던 라인들이 잠시나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이 펼쳐졌다. 세상 모든 신을 끌어모으는 시간. 이번엔 남편 혼자 간병하고 있었기에 불교 기도로 진행되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자원봉사자들은 각자의 종교가 있는 걸까. 세상 모든 신을 끌어 모으는 기분은 어떨까.


무던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기도문이 흘러갔다. 다 같이 숨바꼭질 놀이를 하듯, 슬픔을 꾹 누르는 게임을 하는 것 같다가도 기도를 할 때면 술래에게 잡히곤 했다. 함께 기도하던 보호자들이 눈물을 흘리면 자원봉사자가 등을 어루만졌다. 셰익스피어라고 한들 위로의 말을 지을 수 있었을까. 


기도가 끝나자 자원봉사자들이 우르르 병실을 떠났다. 나 혼자서는 옆으로 돌아 누울 수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목욕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미약하게 끌어안고 있는 진통도 거슬렸다. 무엇보다도 여든의 몸으로 사람들에게 씻겨질 걸 생각하니 끔찍하기까지 했다.


목욕하기로 했던 결정을 번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횟집에서나 보던 방수 앞치마를 두른 봉사자들이 병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가 누운 병실 침대 전체를 움직여 목욕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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