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한참을 걸어갔던 것 같다. 마치 사건의 지평선에 멈춰 서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들을 향해 계속 걸어갔지만 닿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가족과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 작은 상자에 넣고 꽁꽁 싸매서 깊은 블랙홀 속에 넣어버렸던 기억이다. 이제는 다시 찾을 수도, 가 닿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중 가장 행복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 같다. 그리고 멈춰있는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갔다.
삐- 삐- 삐-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병실에서 듣던 바이탈 사인 모니터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점차 커지던 소리가 내 귀에 정확하게 꽂히는 순간, 빛이 들어왔다.
눈을 떴다. 병실이었다.
“엄마, 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강산이에요 강산.”
‘강산’이라는 이름을 한, 나의 아들이라는 사람을 볼 때면 마치 우리 아빠를 보는 것 같았다. 아빠를 꼭 빼닮은 나와 그런 나를 닮은 나의 아들.
내 딸 ‘강해’는 남편을 닮아 얼굴의 선이 곱고 평온해 보였다. 반대로 아들은 나와 얼굴도, 성격도 닮은 듯 조금은 무뚝뚝해 보였다.
‘하… 나의 남편, 딸, 아들… 이런 단어가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휘젓다니…’
이제는 여든의 내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다못해 얼마 전까지 불운과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나의 이십 대가 찰나의 꿈처럼 느껴졌다. 난소암으로 투병하며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잠깐 악몽을 꾼 게 아닐까?
가까스로 의식이 돌아온 나는 다시 다인실로 돌아왔다. 호스피스 병실에는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 의료 간병인이 병실을 하나씩 맡아서 캐어하는 시스템이다. 보호자를 도와 함께 환자를 케어하기도 하고, 보호자의 말벗이 되어 주기도 한다. 602호를 맡고 있던 여사님이 반가워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앞에 있던 젊은 환자와 보호자도 밝게 웃으며 환영해 주었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지하 깊은 곳이 그곳 보다 더 깊은 어둠을 경험하고 나면, 이전의 지하는 천국이 되곤 한다. 맞다. 천국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보고 싶었다.
다인실로 돌아온 오늘도 어김없이 화이트군단 의료진의 회진이 있었고, 핑크 군단 봉사자들이 병실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봉사자들도, 남편도 내게 목욕을 권유했고, 나의 결재를 기다렸다. 환자 본인이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우선시되는 시스템이었다.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맡기고 싶었다.
그런데 간호실에서 나의 상태를 확인한 후 목욕이 취소되었다.
“이서은님, 오늘 목욕해 드리려고 했는데, 간호실에서 체크했더니 아직 미열이 있어서 목욕은 어려울 것 같아요. 내일 오는 봉사자들한테 전달해 놓을게요. 오늘 푹 주무시고 열 뚝 떨어져서, 내일은 꼭 상쾌하게 목욕하셨으면 좋겠어요~.”
내 손을 잡은 봉사자들이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남편이 나를 대신해 말했다.
남편의 말을 뒤로한 채, 핑크 군단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에게 옮겨 갔다. 이윽고 병실엔 가톨릭 기도가 울려 퍼졌다. 맞은편에 있는 여자 환자는 성당을 다니는 것 같았다. 번갈아 가며 병실을 지키던 남편과 친정엄마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어린 두 자녀가 병실에 오는 날이면 진통제를 잊을 만큼 여자 환자의 얼굴이 하루 종일 밝다. 미술 요법이나 음악 요법을 하면서 아이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에게는 어색했던 예수님과 부처님의 콜라보레이션을 기대하게 된다.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벤저스보다 막강한 파워가 생기지 않을까. 내 앞의 젊은 여자 환자 한테는 그 힘이 가서 닿았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