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일동안 남편이 병실을 지킨 뒤에는 꼭 이런 말을 내게 하고 집에 갔다.
“여보, 우리 다음에는 꼭 같이 집에 가자.”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흘려 들었는데, 문득 궁금했다. ‘우리 집’이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점점 내가 속해 있는 가족이라는 것이 궁금해지곤 했다.
남편이 집에 가면 딸이 바통 터치를 했는데, 그래봐야 딱 하룻밤이었다. 샤워하고 편하게 집에서 하루 보내고는 바로 병실로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80대 부부는 병실에서 늘 함께였다. 부러웠다. 여든의 몸에 갇혀 있는 이십 대의 내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착각할 무렵, 지옥은 시작되었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자세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은 되었던 컨디션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아랫배와 골반에서 뻗어 나간 고통은 손끝, 발끝까지 전해지며 모든 감각을 휘저었다. 배를 잡고 웅크릴 힘도 없었다. 열이 나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급하게 진통제가 추가된 후, 안개같이 뿌연 며칠을 보낸 것 같다.
마약성 진통제는 나의 통증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나의 또렷했던 시간을 뺏어 갔다. 물속으로 잠수할 때 들리는, 그런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누군가 내 손을 가만히 잡기도 했고, 얼굴에 난 땀을 닦아 주기도 했다.
눈을 뜨고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과 손,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는 남편과 놓을 수 없다는 듯 손을 꼭 움켜쥐는 딸. 그들이 곁을 지키면서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었다.
내가 좋아했다는 은방울 꽃이 준비된 날. 원예 요법은 나의 남편인 할아버지가 혼자 가서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은방울꽃을 유독 좋아했다는 나를 위해 화병을 만들어 왔다. 병실 침대 머리맡에 화병을 두며 말했다.
“여보, 당신은 젊을 때나 지금이나 참 이 꽃이랑 닮았어. 그래서 당신도, 나도 은방울 꽃을 좋아하나 봐.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해. 어서 기운 차려서 내가 꽃꽂이 한 화병 좀 봐.”
대답하고 싶었지만 외부로 통하는 모든 출구가 닫혀 있는 것 같았다.
아침 회진 시간. 의료진은 나를 두고 말했다. 오늘은 가족들을 다 만나 보게 하라고.
주말이나 평일 밤늦게 얼굴 비추던 아들, ‘강산’이 따뜻한 평일 오전에 왔다. 겨울이는 손에 강아지 사진을 쥐고 와서는 할머니와 인사시켜 준다고 부산을 떨었다. 누구 하나 훌쩍이지 않았는데 눈물을 삼켜 넘기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봉사자들이 방문했을 때, 난 그 병실에 없었다.
나는 일인실로 옮겨졌다. 가족들과 좀 더 편하게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눈을 뜬 이후, 일인실로 옮겨지는 환자들을 봤었다. 일인실로 옮겨지면 하루, 이틀 뒤에 다시 회복해서 다인실로 돌아오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 병실을 임종실이라고 했고, 별님방이라고도 불렀다.
일인실로 간 환자가 다인실로 되돌아오지 못하면, 어느 순간 호스피스의 모든 병실의 문이 일제히 닫히곤 한다. 누군가 임종했다는 뜻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다. 그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아주 작게 들리기도 했다.
나는 일인실에 누워 여전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의식이 저하된 내가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이별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순간이 두렵고 피하고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 갑작스러운 사고로 내 삶에서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었다. 미성년자였던 당시의 나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한 짐이 된 것 같았다. 짐짝처럼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부모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안갯속에서 나의 부모님을 찾아 나섰다. 일인실에 모인 ‘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의 뭉개진 말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보이지 않는 안개 길을 계속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