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던 병원은 기독교(개신교) 병원이었다. 목사님을 자주 뵈었고, 예배 준비를 함께 돕기도 했다.
두 번째 호스피스 병동은 가장 오래 머무르며 마음을 나눴던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 정을 붙여 가고 있다. 국가유공자 및 그 유가족에 대한 진료와 복지 증진을 위해 설립된, 일반 국민의 보건 향상에도 기여하는 종합병원이다. 이 병원 내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주하는 환자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 아픈 전생의 역사가 책 속이 아닌 아직 현실에 있음을 깨닫는다.
두 번째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다.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산하의 종합병원이라 병원 내에 성당이 있었고, 원목 신부님도 계셨다. 병원 내에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수녀님들이 계셨다. 간호사, 센터장 등 실질적인 의료 업무를 하는 전문가들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사, 간호사, 수녀님, 사회복지사, 각 병실의 전문간호인력,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했다. 오전에 봉사자들이 봉사하고 있으면, 원무과에서 오신 수녀님을 만나곤 했다. 환자 옆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기도도 했다. 비단 천주교 신자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종교가 없는 환자들도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는 듯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진심 어린 기도의 파동은 심장을 진동케 한다. 타인이 나를 위해 신을 찾아 기도하며 평안을 청한다는 것만으로도 딱딱했던 마음이 다 녹아버린다.
어느 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며 자주 뵙던 수녀님이 내게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으셨다. 없다고 대답하자 내 손을 잡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온화한 미소 뒤에 장난 어린 눈빛이 반짝였다. 수녀님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저 남자 엄청 좋아해요!”
고요했던 호스피스 병동 복도에 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엄청… 좋아한다는 표현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옆에서 지켜보던 팀원들과 보호자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우리 막내 데려가지 마세요. 제가 선자리 알아볼 거예요.”
“아직 남자한테 프러포즈도 못 받았는데, 수녀님한테 먼저 청혼받았네.”
“우리 아들은 어때?”
팀원들과 보호자들의 반응은 이렇게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같았던 건, 애정을 갖고 바라봐주는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서너 번 더 수녀님으로부터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나이가 제법 있어서 수녀가 되기엔 늦었다고 한 발 뒤로 빼면, 다 괜찮다고 싱긋 웃어 보이시곤 한다.
살아가면서 인간의 삶은 더 아리송하고 어려운데, 짙어지는 확신은 하나 있다. 수녀가 되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다는 거. 안 그래도 작은 그릇 안에 세상 귀해 보이는 것들을 가득 넣고는 발 디딜 틈 없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 그것들이 나를 가두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올해 남은 소중한 달력 세 장, 마지막 장이 뜯기기 전에 내가 서 있는 간장종지에 차곡차곡 쌓아 논 욕심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간장 종지가 어디 가겠냐마는 17평을 33평처럼 넓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