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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묘 Nov 11. 2024

천재는 악필이다...?

필요조건, 충분조건


천재는 악필이다.


이 속설은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나름 살아온 시간을 십여 년 축적시킨 중고등학생을 가르칠 때 듣곤 했다. 수업 중 글씨 지적을 하면 "선생님, 천재는 악필이래요."라며 능구렁이가 잔소리를 넘어간다. 그럴 땐 내가 이야기한다. "악필이라고 다 천재는 아니야. 필요조건 충분조건, 알지?"


초등학생들과 수업할 땐 능구렁이대신 본인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청개구리가 등장한다. 글씨가 엉망인 학생에게 개선을 요구하면 "네."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엉망인 글씨가 여전하다. 나름 노력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글씨 상태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풀이 과정 중에 6과 0을 잘못 보고 풀어서 오답이 나오기도 한다. 9와 7을 혼돈하기도 하고, 등호(=)를 날림으로 써서 숫자 2와 헷갈리는 경우도 봤다.


숫자를 바르게 쓰기엔 아직 어리다고, 지금이 연습하고 배워나가는 시기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이런 마음은 한숨 푹 나오는 시험결과를 받아 들고 나서야 바뀐다.


글씨가 엉망인 건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이다.


부지런하지 않게 문제를 읽어 정확한 이해를 놓쳤을 것이고, 조건도 놓쳤을 것이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설렁설렁 대충, 또는 급하게 써 내려간 풀이 때문에 어이없는 실수도 있고 계산 실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만족스러운 시험 결과일리가 없다.


예외는 있다. 괴발개발 써 내려가면서도 쓰는 족족 정답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계가 많아지는 고학년 수학 과정으로 갈수록, 단 하나의 실수로 등급이 바뀌는 중요한 시험일수록, 괴발개발 쓴 글씨가 이득일리 없다.


초등학생들과 수업할 때는 단순히 잔소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소근육의 발달에 차이가 있어서 더더욱 제대로 쥐고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명확한 지시를 한다.




연필이 깎여 있는 끝 부분에 손가락을 정확하게 잡아.

손 끝에 힘을 주고 천천히 적어.

(그럼에도 휘리릭 날려 써버린다.)

여기 칸 안에 들어가는 크기로 바르게 적으려고 노력해 봐.

처언~처언~ 히~ 쓰는~ 거야~~



 

구체적인 방법을 이야기하며 바로 앞에서 하나하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제법 나아진 필체를 보여준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우와~ 이렇게나 잘 쓰면서!"라고 칭찬을 하며 작은 성취가 지속적인 동기부여로 이어지길 바란다.


대부분은... 돌아서서 다른 학생들 서너 명쯤 채점하고 나면, 자취를 감췄던 지렁이들이 다시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책에 지렁이가 사나 보다"하고 잔소리 후에 다시 학생 앞에 앉아 글씨체를 바로잡도록 한다.


늘 느끼는 건, 우리가 어리다고 여기는 초등학생이라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글씨 바르게 써! 똑바로 써!"라고 말하는 것보다 "글씨가 엉망인 건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이래. 다시 바르게 써봐."라고 말하는 게 효과가 컸다.


학교에서 배운 건지 전래동화에서 터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초등학생들에게 부지런하지 않다는 오명은 불쾌한 것 같았다. 게으름뱅이는 싫다며 글씨를 바르게 쓰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어려서는 게으름뱅이의 대명사인 베짱이가 개미에 비해 참 한심해 보였는데, 지금은 삶의 유희를 아는 낭만있는 아티스트 같다.)


수학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예쁜 글씨를 떠나 바르게 쓰는 게 필요하다. 각양각색의 글씨체가 매력으로 자리 잡기도 하지만, 신언서판을 관리 등용의 기준으로 두기도 했던 것처럼 나를 보여주는 바른 글씨체를 가져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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