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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할 어벤저스들을 가르치는 거야.

스승의 날

by 미묘

나는 생명을 직접 살려내는 의사는 아니다. 위급한 상황에 몸을 던져 사람들을 구하는 구급대원도 아니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달려가는 경찰도 아니다.


나는 수학을 가르친다. 그것도 사교육. 아이들이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 어쩌면 온 국민이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 그 수학 말이다. 얼마나 싫었으면 '수포자'라는 말이 양산될 정도일까?


처음부터 이 일이 거창하게 느껴졌던 건 아니다. 물론 지금도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원대한 열망이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수학을 좋아했던 긴 시간이 나를 이 길로 이끈 것 같다.


다양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친 지도 어느새 20년이 가까이 흘렀다. 그동안 가르치는 아이들의 연령은 다양했지만, 나는 여전히 교실에 있고, 칠판 앞에 서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한때는 의학 드라마를 보며 '나는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건 아니잖아.' 영웅 시리즈를 보며 '내가 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닐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문득 깨닫곤 한다. 난 아이들의 인생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는 걸.


초등학고, 중학교, 고등학교... 돌이켜보면 짧게만 느껴지는, 그 강렬하고 가장 중요한 시기. 아이들은 작은 말 한마디에도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작은 인정에도 삶의 빛깔이 바뀐다.


그런 시기에 누군가 옆에서 해주는 말에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 같은 힘이 있다. "넌 할 수 있어." "괜찮아,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 한마디 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그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누군가에게는 그런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종강을 앞두고 오랜 시간 가르쳐온 학생이 조용히 찾아와 건네주는 편지, 혹은 학부모님의 편지에 "선생님을 만나고 수학이 재미있어졌어요.", "선생님 덕분에 수학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선생님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에요."라는 말이 적혀 있을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졸업한 지 오래된 제자가 쑥스럽게 건넨 안부는 늘 반갑다. "선생님 덕분에 수학을 포기하지 않았어요."라는 말과 함께 쑤욱 성장해 버린 모습을 보면, 나는 내일을 다시 한번 사랑하게 된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그런 선생님들이 있었다. 때로는 엄하게, 대부분은 따뜻하게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신 분들. 나 혼자 컸다고 못나게 말하기도 하지만, 실은 인생의 시기 적절한 때마다 만난 선생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셨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작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수학을 가르치고 사람을 성장시킨다. 개념 정립하며 공식을 유도하고 깊게 사고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답을 찾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심어준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향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은 세상을 구할 어벤저스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멋지게 커야 해."


그러면 아이들은 너스레를 떨며 대답한다. "우리가 어벤저스가 되면, 선생님은 할머니가 되어 있겠다, 하하하"


... 그래. 그래도 좋다. 그게 내가 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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