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의 천국 찾기
병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볕처럼 수줍어했다. 여든이라는 세월이 수놓은 은발의 머리칼이 햇볕에 살랑거렸다. 호스피스 병동에 휠체어를 타고 입원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무엇보다도 또렷하게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에, 병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흘깃 가 닿았다.
“혈압부터 잴게요.”
낯선 병실을 둘러보기도 전에 입원 생활에 대한 다양한 지침이 간호사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혈압을 재던 간호사가 물었다.
“혈압이 좀 있으시네요.”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언니가 있는데, 혈압으로 고생 고생을 하다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어느 날 혈압약을 딱 끊었대.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정작 약을 끊으니까, 혈압이 살짝 높은 정도? 뭐 그 정도로 유지가 됐다는 거야.”
사람들의 눈은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했지만, 모든 귀가 할머니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나도 혈압약을 끊어 봤는데... 혈압이 높은가 보네...”
멋쩍은 듯 작아진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욱더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일명 호호할머니의 독주가 시작됐다. 맞은편 환자의 발을 마사지하느라 할머니를 등지고 있었지만 온 신경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쫓고 있었다.
“등본은 언제 제출하실 거죠? 가족분이 댁에서 같이 사시는 거면 등본은 본인 앞으로 떼지 않아도 돼요”
간호사가 할머니의 손목에 환자 식별 팔찌를 채우며 물었다. 호호호 수줍게 웃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어머~ 우리 오빠랑 내가 왜 같이 살아요~ 딱 봐도 진작 시집갔지. 내가 왜 여즉 친정에서 살겠어~ 우리 오빠가 워낙 살가워서 필요한 서류 챙겨 준다고 한 거예요. 다리 아파서 오래 걷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살갑게 챙긴다니까?”
단 한 번도 쉽게 대답하지 않는 할머니를 보며 쿡쿡 웃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았다. 결정적으로 나의 웃음을 유발한 건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본인의 일을 해내는 간호사 때문이었다. 질문에 해당하는 답변을 단답형으로, 그것도 아주 간결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랄까...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호호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귀여웠다.
“키, 몸무게 말씀 주세요.”
이번 답변도 산 넘고 물 건너 돌아 돌아 간호사를 향해 가는 듯했다.
“키가 줄었더라고요. 160이었는데... 뭐 얼마 전에 150이래요. 알잖아요~ 늙으면 키는 줄고 몸무게는 늘고... 150에 80 이래...”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엔 도통 맘에 안 드는 키와 몸무게를 향한 불만이 가득했다.
“네, 키 150에 몸무게 80, 맞죠?”
딱딱하게 본인의 일을 해내는 간호사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밝기만 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뾰로통해졌다. 그리고 남일이라는 듯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다. “150에 80이래요...”
앞으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월요일마다 마주하게 될 할머니가 기대 됐다. 소녀 같이 사랑스럽고 밝은 할머니의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력이 다해서 말하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힘들어지는 그런 날이 왔을 때, 지금의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꺼내어 볼 것이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얼마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보며, 누구보다도 천국이 있기를 소망했다.
마음을 깊게 나누는 친구가 몇 없다. 그런 내가 천국을 소망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목욕, 샴푸, 발마사지... 힘든 삶의 여정에 나의 손길이 위로가 되길 바랐던 순간들. 그때의 인연을 천국에서 다시 만났으면 했다. 아프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국에서 호호할머니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 같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다 모아서 나를 마중 나올 것 같았다. 천국에 갈 자신이 없는 나는, 귀찮더라도 저승 입구까지 나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암만 천국을 갈 수 있대도 지금 당장 가겠다고 흔쾌히 말할 사람이 있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괜히 있나 싶다. 그래서 난 늦은 저녁 퇴근을 하면, 나만의 작은 천국을 이승에서 찾는다. 숨 막히게 더운 여름 날씨에, 달팽이처럼 끈적한 몸을 겨우 움직여 샤워를 한다. 그리고 선풍기 앞에 앉아 냉장고 속 미리 잘라두었던 수박을 한 입 베어 문다.
안녕? 나의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