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귀성을 위해 이동하고 있을 추석 명절, 두 딸과 함께 1박 일정으로 경주로 출발했다. 며느리로서의 도리는 2년 전에 내려놓았기에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의 명절은 자유롭다.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는 남편은 해외 워크숍이 추석 연휴와 겹치는 바람에 연휴가 시작되던 날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났다. 시댁에 발길을 끊은 나를 제외하고 남편 혼자 사춘기 두 딸을 데리고 본가에 다녀오곤 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없었으니, 장손 아들 하나, 며느리 하나인 시댁은 썰렁 그 자체였을 테다.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즐거워지기에 꾹꾹 눌러 참은 15년 세월의 결과, 나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고 본인의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친정엄마에게는 질려버렸다. 갈등의 한 중간에서 남편과의 전쟁은 갈수록 심해졌고, 내가 건강하게 살아남는 게 먼저다, 내 가정을 지키는 게 먼저다,라는 생각으로 양가와의 교류를 끊었다. 외롭고 외로운 결정이지만 만신창이가 된 나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처참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극강의 고통이 훑고 지나간 후에 돌아보니, 시댁과도 친정과도 너무 밀착되어 있었고, 나는 '효'라는 명목의 정서적, 감정적인 노동으로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 보였다.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산더미 같은 에피소드,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건들이 차고 넘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려 오는 탓에 글로 쏟아내는 것은 아직 두려운 영역으로 남아있다. 언젠가 이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진 후에 글로 풀어낼 수 있는 때가 오기를.
황리단길을 목적지로 선택한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즐거움이 곧 내 즐거움인 나다운 선택이었다. 사춘기 두 딸은 이제 박물관보다는 아기자기한 소품샵과 다양한 먹거리 구경이 더 신날 터. 남편의 기호는 싹 빼고 내 맘대로 한옥 숙소를 예약해 두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들을 검색했다. 긴 연휴 중에도 굳이 추석날 아침을 한옥에서 맞이하기를 선택한 것은 평범한 날들과 다를 것 없는 명절 아침을 보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싶은 내 마음을 하늘도 알았을까, 추석임에도 뜨겁게 불타오르던 날씨가 그날 하루만큼은 구름 가득한 선선한 날씨였고,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걸 후회하게 했던 빗방울도 뚝 그쳤다. 명절에 문 닫은 가게가 많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은 천지개벽한 세상을 모르고 명절에 시댁에 처박혀 시어머니의 막말을 받아내며 전만 부쳐대던 나의 기우였다. 주차장은 터져나갈 듯했고,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세상에, 명절에 즐겁게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그동안 내가 바보같이 살았던 건가, 아니면 정말 세상이 변한 건가.
예쁜 것들을 눈에 담고 처음 보는 한옥 거리와 골목골목을 구경하며, 딸들은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에도 까르르 신이 났다. 엄마와는 헤어져 아빠와 할머니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는 명절을 따분해하기 시작할 나이다. 남편은 시차를 사이에 두고 때때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명절을 해외에서 따로 떨어져서 세 여자가 여행하고 있는 것을 어떤 감정으로 보고 있을까. 미안할까? 섭섭할까? 못 간 친가 걱정이 가득할까? 그러나, 애써 관심 끄기로 한다. 딸들은 평범한 방 한 칸짜리 한옥 펜션에도 즐거워했다. 아늑하게 조명이 켜진 야외 테이블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의 말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는 딸들은, 그렇게도 아들 타령을 해대던 시어머니의 말들에 콧방귀를 날려주지 못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였다.
다음날,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세 여자는 펜션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으러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말끔하게 개인 파란 하늘 아래, 한옥 펜션 건물 뒤로 파릇한 고분의 둥근 곡선이 산뜻하다. 간단한 토스트와 베이글, 삶은 계란과 과일들에 커피와 주스 등으로 구성된 조식은 간단하지만 아침 식사로는 충분했다. 남편을 약 올리기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끼리도 명절을 즐겁게 잘 보냈으니 염려 말라는 생각이었을까, 사진을 남겼다. 흐뭇하게 사진을 들여다보며 문득, 지난 결혼 생활 동안 시어머니를 도와 정신없이 차려낸 차례상이 떠올랐다. 명절 열흘 전부터 준비해서 명절날 아침에야 완성된 상다리 부러질 듯한 차례상. 솜씨 좋은 시어머니의 정성 가득, 영양 가득한 차례상 보다 간단한 토스트가 더 행복한 이유는, 이 자리에 내가 바로 서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의견, 나의 감정, 나의 노동이 무참히 뭉개져 있는 차례상보다 파릇한 하늘을 보면서 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토스트가 더 좋다는 사실.
일흔도 훨씬 넘은 시어머니는 아들, 며느리와 손녀딸 없는 명절날 아침에도, 자부심 가득한 차례상을 차려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을 모시는 게 산 사람들의 행복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도대체 뭣이 중하단 말인가? 그 모든 해결되지 않는 시시비비를, 나는 이제 내버려둔다. 시어머니가 바로 서는 자리는 그 차례상 앞이라 해두고, 이제 나는 토스트와 함께 있기로 했다. 나부터 바로서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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