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막내인 둘째 딸의 12번째 생일이 되었다. 2012년에 태어난 용띠 아이가 처음으로 만난 용의 해이지만, 정작 아이는 용의 해라는 것도 까맣게 모를 터. '만 12세'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뱃속으로 낳은 엄마만의 감성일 뿐이다. 올해를 두 달 여 남겨둔 늦은 생일이어서인지 자그마하고 늦되고 뭐든지 어리숙해 보이던 아이다. 듬직한 첫째에 이어 우리 집 막내도 벌써 한 바퀴 돌아 12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감성적인 엄마의 여린 부분을 또 한 번 건드린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니, 올여름까지만 해도, 친구와의 소통에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더랬다.
"아우, 진짜! 급식 우유를 먹지도 않는 내가 매일 우유상자 가지러 같이 가줬는데! 엘리베이터 타고 가자고 했더니 싫다고 화내고는 우유통을 놓고 그냥 가버렸어! 나 혼자 5층까지 들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도와준 친구에게 무거운 우유 상자를 떠넘기고 간 그 친구 잘못인 걸까, 학생은 이용금지라는 학교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고 꼼수 부린 이 녀석의 잘못인 걸까. 접점을 찾지 못하고 불쾌하게 끝나버린 사건의 전말을 들으며 관계의 미숙함이 보였었다. 겉으론 키가 훌쩍 큰 아이들이지만 아직 어린 녀석들이었다.
뜨거웠던 지난여름 방학, 만나서 놀기보다는 집콕하며 온라인 기기들과 한 몸 되어 지내는 동안, '친구들이랑 만나서 안 놀고 싶나? 좀 나가서 세상을 느끼고 부딪혀봤으면', 하는 부모로서의 조바심이 있었다. 그런데 2학기가 되고부터 뭔가가 달라졌다.
"엄마, 1학기 때 무리 지어 몰려다니던 애들 말이야. 걔들이랑 좀 친해졌는데, 생각보다 착하더라?"
"가윤이네 엄마는 아직 카드 쓰는 거 반대래. 그래서 키오스크에서 내가 두 개 주문하고 가윤이가 돈을 줬어."
"엄마, 찐친이라는 게 이런 건가 봐. 저번에 가윤이가 원뿔원으로 산 거 하나 줘서, 오늘은 내가 사줬어."
우유 당번 사건으로 분노했던 그 친구와 화해를 넘어서 주말에 4시간 내리 붙어 다니며 찐친이 뭔지 알게 된 이 녀석은, 아이의 세상에서 어른의 세상으로 한 뼘쯤 다가온 느낌이다. 상황과 관계의 줄다리기에서 낄끼빠빠와 눈치, 역지사지의 행동 버튼을 마음속 어딘가 희미하게 장착한 성숙의 표정이 보이는 것이었다.
내 생일은 제일 뒤에 있다며, 생일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아이가 올해는 10월에 접어들고서도 덤덤한 것에도 어리둥절했다. 생일인데 갖고 싶은 거 있어? 먹고 싶은 건? 남편과 나는 막내의 생일을 챙기느라 아이보다 더 아이 같아졌다.
"갖고 싶은 거? 글쎄, 없는데......"
장난감 선물을 준비하던 건 이미 옛날에 끝났고, 실용적인 옷이나 학용품을 사주는 것도 이제 끝난 건가? 남편과 나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끼며, 케이크를 사고 미역국을 끓였다. 가족 다 같이 모여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를 하는 자리에는 실물 선물은 없이 전송 버튼만 있었다.
"핸드폰 열어 봐."
편의점 모바일 상품권, 다이소 모바일 상품권 등을 본 아이는 놀라는 표정과 함께 그제야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짓는다. 중학생 첫째 때도 겪어봤던 과정이지만, 우리 부부는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다. 선물에 신나 하고 날짜를 새며 기다리는 아이의 생일을 기대했던 걸까? 가족의 이벤트 종말이 엿보여서일까? 첫째 때는, 우리 아이가 벌써 모바일 상품권을 쓸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신기하고 다 키운 것 같은 즐거움이었는데,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다른 기분이라니. 그러나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셀프 계산대에서 처음으로 모바일 상품권 바코드를 찍어보며 즐거워할 아이를 떠올리니, 이 허전함은 이제 내려놓아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여기 봐봐. 한 번에 다 쓰는 게 아니고, 필요한 거 한두 개 고르고 계산대에서 바코드 찍으면 금액에서 빠져나가. 금액을 다 쓰게 됐을 때는 나머지는 카드로 추가 결제 해야 되는 거야."
그 어떤 대화나 잔소리에서도 볼 수 없었던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엄마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아이는 지금 내 품 안에서 날갯짓 연습을 하고 있는 작은 새다. 실수나 위험으로부터 차단하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게 걸어 나가도록 등을 살짝 밀어줘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더 일찍부터, 혹은 더 늦게, 아이가 부딪혀 겪는 속도는 아이마다 다르다는 것을 두 딸을 키우면서 느낀다. 그것은 아이를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어린애 같을까, 했던 생각이 12번째 생일을 지나가면서 어느새 커버린 아쉬움으로 변하다니. 어떤 기준에 맞춰 아이를 재단하고 판단했던 것도 아이에겐 폭력이 아니었을까.
촛불을 불고, 생일 선물을 주고받은 후 자연스럽게 12년 전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춘기 아이들과 긴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은 편인데, 제왕절개로 엄마 배를 짼 이야기, 좋은 날 태어나야 한다고 아빠가 철학관에서 줄 서서 날짜를 받아왔던 이야기, 세 살 아기였던 언니가 처음으로 동생을 보고 '아가야!' 불렀던 이야기엔 두 녀석 모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12년 전의 감상에 빠졌다. 뱃속에 있던 아기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엔 당시의 감동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의 눈물에 의아한 듯 보이는 사춘기 두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년 전의 감동을 소환한 엄마의 눈물을 통해 자신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한 번의 중2는 지나가고 있고, 또 한 번의 중2가 다가오고 있다. 두 딸의 사춘기를 관통하면서 나도 감정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계속될 두 녀석의 사춘기가 안전하고 행복하길, 그리고 나의 사십춘기도 글쓰기와 함께 안녕하고 더욱 발전적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