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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Oct 08. 2024

해리포터와 소공녀민트

소설 주고 웹툰 받는 딸과의 독서

"오늘도 30분 책 읽기. 자, 시작!"

"응!"


엄마 말에 공허한 대답만 날리던 딸아이는, 이제 제깍 소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서로 눈빛으로 힐끗거리다가 씩 웃으며, 아이가 묻는다.


"엄마, 몇 화까지 봤어?"

"46화"

"어휴! 왜 이렇게 느려. 이제 겨우 거기야?"


딸은 <해리포터>를 펼치고 있고, 나는 아이가 추천한 웹툰 <소공녀 민트>를 보고 있다. 나는 일부러 최대한 천천히 웹툰을 정독하는 것처럼 읽고 있는데, 그보다 딸 몰래 전자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은 딸에게는 절대 비밀이다.






6학년인 이 녀석의 꿈은 웹툰 작가다.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해서 교육청의 미술영재교육을 이수하기도 했으나, 내 눈엔 특출 난 재능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올해 초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로는 기특하게도(?) 일본에서 그림을 그려며 살 거라는 원대한 꿈을 세웠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학습지로 배우게 해 줬더니 일본어가 보이면 눈 크게 뜨고 읽는 즐거움에 심취해 있다. 꽤 어려운 영어 단어를 배웠다며 '이 단어 알아?' 퀴즈를 낼 때마다 아빠나 엄마나 언니는 척척 맞춰버리니 풀이 죽곤 했는데, 일본어는 의기양양하게 읽어내도 모두들 눈만 꿈벅이고 있다. 그러니 가족들 중에서 제일 잘하는 분야가 생긴 막내의 콧대는 매일 조금씩 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고학년이 될수록 책 읽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스마트기기와 밀접한 생활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웹툰을 서로 추천해줘 가며 보는 현재의 문화에서 내 아이만 대화 주제에서 소외되게 할 순 없고, 태블릿 PC와 펜으로 그림을 그려 영상 편집도 하는 게 일상인 세상이니 아이의 취미나 꿈을 응원하는 데 있어서 스마트 기기를 배제할 수도 없다. 시험 기간이면 디지털 디톡스 앱을 가동해 놓고 각 잡고 공부하는 중2 언니처럼 스스로 자제하고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습관을 만들어 놓고 싶은데, 코로나 대유행 시기를 거치며 스마트 기기에 더 일찍 노출된 까닭인지 이 녀석에겐 쉽지 않다.


뒤늦게 독서에 심취해 책의 즐거움과 중요성을 절절히 느끼고 있는 나이기에, 후회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내가 독서지도에 더더 심혈을 기울였으면 달랐을까? 더 일찍부터 함께 독서를 즐겼으면 책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어있진 않을까? 교육에 있어선 모든 게 내 탓인 듯 느껴지는 것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이런 기분은 나에게 득 될 것이 없으니, 떨쳐내기로 한다.


그나마 올해는 독서기록장을 운영하며 책 읽기를 지도해 주시는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다. 매일 아침 등교 후 독서 시간을 주고 1주에 한 권 독서기록을 제출하는 식이었는데, 1학기 중반이 지난 시점에 학급회의 결과로 2주에 한 권 독서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아쉽긴 했지만, 학원으로 바쁜 아이들이 민주적인 회의를 거쳐 결정한 안을 수용하신 선생님의 교육철학이 엿보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꾸만 가벼운 책을 집어드는 딸에게 해리포터를 강력하게 추천했다. 해리포터를 원서로 읽는 아이도 있다던데, 무려 한글책이거늘! 얼굴 찌푸리던 아이는 읽고 싶은 책도 없었던 터라 자포자기하듯 한 권을 읽고 독서기록을 썼다. 평소 선생님은 간단한 첨삭과 함께 '감정을 풍부하게 넣어서 쓰는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등과 같은 응원글을 써주시곤 했다. 이번에는 해리포터의 전체 시리즈 제목들이 빨간 볼펜으로 공들여 쓰여있는 것을 보고, 아이의 독서를 응원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도 선생님과 무언의 협력을 하기로 하고, 아이가 갖고 싶어 하던 샤프펜슬을 내걸었다. 그렇게 <해리포터 비밀의 방> 두 권 완독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계속 조건부로 책을 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밤 12시에 업데이트되는 웹툰을 보고 자야 한다며 자꾸만 늦어지는 취침 시간에 잔소리를 해대는 날이 잦아졌다.


"엄마도 한번 봐. 얼마나 재밌는데......"

"엄마는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하거든?"


나도 안다. 나도 저 나이 때 <풀하우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 만화책을 친구들과 돌려보느라 수업시간에 서랍 속에 숨겨가며 봤었으니, 그에 비하면 자정을 기다리는 건 오히려 양반 아닌가.






나는 종이책 <파리대왕>을 읽는 중이었다.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의 날 것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있어서였을까, 나에게도 꾀가 났다.


"좋아! 엄마도 <소공녀 민트> 볼 테니까, 너는 해리포터 읽자. 하루에 30분 동안 보는 거야, "


평화롭게 아이의 독서 시간이 세팅되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웹툰의 재미를 추천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나의 의도는 아이의 장단에 맞춰주는 동시에 혹시 모를 웹툰의 폭력성이나 선정성을 점검해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웹툰 내용을 함께 얘기하면서 혹시 모를 선정적인 내용도 대화 주제로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염탐꾼 엄마를 웹툰의 세계에 끌어들여 놓고 만족스럽게 해리포터를 읽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 모녀가 얻는 것은 새로운 작품 세상과 사춘기를 대비한 유대감일 테니, 이 등가교환의 비등함은 얼마나 경제적인가. 그 비등한 만족감으로 해리포터를 읽고 있는 아이도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세상의 원리를 하나 배웠을 것이었다. 단, <해리포터> 시리즈는 길고 길기에 <소공녀민트>를 일부러 느리게 정독하는 것은 나의 꼼수였지만, 짤막짤막한 텍스트는 정독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림과 말풍선 사이에는 행간의 의미도, 상상하여 떠올릴 장면도 여간해선 찾기 힘들었다.


"거봐 엄마, 의외로 재밌지?"

"그러네. 재밌네. 그런데 말이야. 남주가 너무 못생긴 거 아냐?"

"그런데 엄마, 56화는 보지 말고 건너뛰어. 안 봐도 이해될 거야. 거기 남주가 목욕하는 장면인데, 좀…… 눈 버릴 거야."


하! 이거 잘 걸렸다. 얼마나 눈 버리는지 한 번 보자. 엄마가 안 볼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직 너무나 순진한 녀석 아닌가. 아이가 말한  '눈 버린다'는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녀석의 사춘기를 건강하게 지나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독파시키려면 100여 편에 걸친 <소공녀민트> 다음에 읽을 작품이 줄줄이 대기 중이니, 웹툰의 세계를 장기적으로 섭렵하게 될 나를 위해 정독, 다독의 기술을 감쪽같이 장착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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