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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Aug 23. 2024

그 여름의 노뱀벌

여름휴가 코스로 전남 고흥을 찍고 지리산을 추가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지만 처음 가보는 지리산을 경험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콕 집은 곳은, 차로 올라갈 수 있는 ‘노고단’! 나에게 지리산은 어릴 적 가본, ’ 차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노고단‘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자 남편이 응수했다. 20대 치기 어린 시절,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도전해 본 적이 있단다.


“남자 넷이서 거창하게 계획을 세웠었지. 지리산 종주를 해보자고! 헉헉 거리면서 성삼재 휴게소에 딱 도착을 했는데,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순간, 씁~~. 글쎄 여자들이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 충격과, 배신감이란...... 그래서 어떻게 됐게? ‘야! 종주? 의미 없다! 그만 내려가자!’“


난 또, 끝까지 종주를 했다는 줄? 차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사탕발림을 해서 여름휴가 코스에 그럴듯하게 올렸더니, 남편이 하나 더 추가한다. '뱀사골 계곡'. 친구의 남편이 남자들끼리 계곡에서 놀다가 미끄러져서 어깨뼈에 금이 갔다던데, 대한민국의 중년 남자들은 계곡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여름엔 바다보단 계곡이란다. 서늘한 계곡.


그렇게 여름휴가를 떠났다. 고흥에서 이틀을 보낸 후, 지리산 성삼재 휴게소를 목적지로 찍고 꼬불꼬불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서늘해지는 공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성삼재 휴게소가 저 앞인데 50m를 남겨두고 차가 그대로 줄지어 서있다. 휴게소 주차장이 만차인 상태라 한 대가 빠질 때마다 한 대씩 들어가는 중이었다. 잠시 전망을 보면서 커피 한 잔 하는 게 전부겠지만, 아이들에게 지리산 노고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코 앞인 성삼재 휴게소에서 눈높이에서 느껴보는 구름은 기억에 남겨주고 싶었다.


엄마 마음도 모르고 기다림에 투덜대는 녀석들. 방금 전 비워진 주차 자리를 겨우 찾아 주차를 하고 전망대까지 계단을 조금 올라가는 길이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걷는, 우리 집 소녀들의 심드렁한 걸음걸이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다는 사실. 넓고 다양한 세상, 우리나라 곳곳의 자연을 보여주고 싶고, 느끼게 해 주고픈 마음은 나만의 생각인가 보다. 어릴 때, 동물원 사자에 ’우와!‘, 넓은 바다나 예쁜 꽃에 ‘우와!’하던 사랑스러운 딸들은 이제 기대하면 안 된다고 애써 내 마음을 다스리며 올라가는 중이었다. 깊고 깊은 국립공원 산 속이라, ‘야생동물 주의‘, ‘뱀, 벌 주의'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있었다. 흔하게 어디에나 붙어있는 문구들이라 무심하게 넘긴 나. 심드렁하던 그 속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중2 소녀의 한 마디.


“ 노뱀벌~~ 예~~"


노뱀벌이어야 하지, 암~~


손가락 브이는 왜 날리는 건지? ’ 내가 제일 잘 나가 ‘의 표정과는 안 어울리게 얼굴 근처로 달려드는 파리를 발견하고 꺅꺅 소리 지르는, 질질 끄는 슬리퍼와 ‘노뱀벌 브이’의 중2는 내 딸이지만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진다. 세상 진지한 FM 엄마로서는 저 순발력과 유머와 부조화스러움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유머가 아니라 사춘기의 4차원 머릿속인 건가? 어쨌거나, 심드렁했던 발걸음은 노뱀벌 한 마디에 빵 터져 한껏 유쾌해졌다.


머리 위로 가까이 느껴지는 구름과 함께, 저 아래 펼쳐진 푸르른 세상을 굽어보는 기분은 짜릿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아이들은 사진 한방 찍자고 들이대도 고개를 젓는다. 내 휴대폰의 사진첩에 인물 사진이 확연히 줄어든 지 몇 년 째이긴 하다. 간신히 뒷모습만 담는 데에도 얼마나 날렵한 순발력이 필요하던지. 몰래 찍은 뒷모습마저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초상권 운운하며 떠들어댈 것이 뻔하다.


그래도 중2병이 이만하면 할만하네


지리산을 꼴딱 넘어 뱀사골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무더운 여름의 캠핑이 너무 힘들어서, 재작년쯤부터 여름 계곡을 느껴본 지는 한참 되었다. 샤워나 탈의실이 없는 상황 때문에 물놀이를 거부하는 중2를 보니, 너도 이제 여자구나 싶었다. 큰 아이는 나와 함께 계곡 얕은 물에 캠핑 의자를 놓고 발을 담갔고, 아직은 어린이다움이 남아 있는 6학년 둘째가 아빠와 '입수'를 했다. 깊은 산속 계곡물의 서늘함에 덜덜 떠는 아이 옆으로 풍덩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내 남편이다. 발만 담그고 있어도 추워지는 물에 스노클링 마스크까지 쓰고 뛰어들어 잠수를 하며 '물고기도 보여!' 소리치는 저 남자는 지금 이 순간, 어린이다. 옆에 앉은 중2에게 말했다.


"신났네 신났어. 아빠 좀 봐. OOO 어린이다. OOO 어린이."


저 천진난만한 남자는 내 남편인가, 아들인가. 이 여름, "우와!"라는 감탄 한 마디 궁색해진 딸들 대신 남편의 호들갑이 아직 남아있음에 감사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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