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조희
트럭이 꾸역꾸역 검은 비닐봉지를 낳고 있어요 아파트 담벼락 옆으로 사과밭이 펼쳐졌다니까요
한 사내가 사과 궤짝에 앉아 타임머신을 돌리듯이 껍질을 깎고 있어요 나선형 껍질을 따라 사과밭 둘레길을 걸어요 그 하얗던 열일곱 살 허벅지 같던
굴러가는 시간 위에서 사과의 안과 밖은 모호해요 겨우 지나오니 걸어온 길이 보이더군요 사과 바깥에서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어요 매일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바스락거렸죠
사내의 주름진 이마에서 땀방울이 사과 속으로 떨어져요 사과가 붉어진 이유지요
붉게 익는다는 것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처럼 겨울을 견뎌냈다는 것 모질지 못한 뿌리로 버텼다는 것 그래도 가끔 실패하면서 꽃을 피웠다는 것
사과 한 입씩 베어 물고 마음이 아삭거릴 때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기로 해요 이제 멍든 통증이 찾아와도 꽃처럼 울지 않아요
사과 껍질 사이로 시간의 문이 열렸다 닫히고 열렸다 닫혀요 사과밭이 떠나가려고 해요
이제 그를 버려야 하나요 가슴에서 붉은 과육이 뚝뚝 떨어져요 내가 검은 비닐봉지를 낳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