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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간

by 서기선

얼음이 언다.
기억보다
햇살이 먼저 굳는다.
빛이 멎은 자리에
그늘만 남아 조용히 자란다.


그대는 말이 적어졌다.
손등보다도 더 희미해진 말끝이
문득, 숨결처럼 사라진다.
나는 그 빈틈을 쫓아
이야기를 얼려본다.
슬픔은 서늘한 쪽에 오래 남으니까.


눈이 내린다.
눈밑 세상이 얼어버렸다.
시간이 얼어붙은 창밖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 창엔 계절이 가지 못한 발자국만 남아 있다.


겨울을 듣는다.
눈이 내릴수록
세상이 조용해지니까.
한 발 늦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처럼
그대의 이별도
뒤늦게 오길 빌어본다.


겨울이여,
숨소리보다 느리게 흘러라.
따뜻한 말은 얼음장 밑에 숨기고
가장 차가운 온기로
아버지의 시간을 오래 붙들어다오.


손을 잡는 대신
그림자를 마주 보는 시간.
늙음은 그저 쉼표일 뿐,
우리는 아직,
이 계절의 끝을 쓰지 않았다.



작가의 말 :

이 시는 지난 여름 당선의 기쁨을 안겨주었던 3편의 시 중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적었던 시입니다.


심사평:

시인의 상징적 시어들이 빛을 발한다.

이미지 중심의 전개를 보이며 추상적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시인은 매우 능숙하고 뛰어나다.

감정과 상황을 암시하는 방식의 제시는 시인의 특유한 서정을 드러낸다.

또한 '계절이 가지못한 발자국' , '숨소리보다 느린 겨울' 등 독특한 시간 감각을 드러내는 표현은 내면의 의식 흐름을 반영한다.

시의 후반부에 나타난 구체적 개인(아버지)을 통해 보편적 감정을 동시에 환기하는 시인의 감성이 짙어지며, 차분하고 섬세한 어조는 주제를 강조한다.

심사위원 합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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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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