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참자기와 거짓자기

by 조이

나는 크고 호탕하게 웃는 편이다. 그런 나의 웃음소리는 그야말로 '하하하'다. 그래서인지 카톡에서 '하하하'라고 쓰면 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음성지원된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종종 본다. 나는 남들에게 쾌활하고 밝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남들이 그렇다고 말했고, 나도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나의 내면은 겉모습처럼 마냥 밝지는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정물 같은 감정은 맥락 없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에메랄드빛 바다 앞에서 아이들과 물장난을 치다가도 불쑥, 친구들과 깔깔대며 거리를 걸을 때도 불쑥, 퇴근하고 돌아와 소파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불쑥. 어두운 감정은 구석에 몰래 숨어있다가 아무 때나 갑자기 튀어나와서 잽을 날리고 갔다. 일이 많다든지 관계가 안 풀린다든지 할 때는 그런 감정이 올라와도 이해를 하겠는데, 행복할만한 순간에 불쑥 그런 시궁창 같은 감정이 올라오면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도대체 왜 행복한 순간에도 잽이 날아오는 거냐고!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유아기 초기에 '참 자기'와 '거짓 자기'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점차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감정이나 생각을 편안히 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는 자기감정을 통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형성된 '참 자기'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며 진짜 자기를 가졌다는 느낌을 갖게 함으로써 생동력 있는 삶의 원천이 된다. 반면 아이에게 필요한 돌봄이 부족했거나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보다는 부모의 비위를 맞추거나 순종하는 식으로 타인을 기쁘게 해주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자기가 처한 환경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면 아이는 '참 자기'를 미처 발달시키기 전에 그 에너지로 '거짓 자기'를 만들어 외부로부터 자기를 지키려 든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 자기'가 비대해지면 삶의 생동성을 느끼기 어렵고 삶이 마치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연극 같이 느껴져 어딘가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이로서 갖는 미성숙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아이들은 커서도 '착한 아이 컴플렉스'를 가진 채 '착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No를 말하기가 어려워 Yes만을 말하는 사람, 웃는 얼굴만 보여주려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다 맞춰주려는 사람... 이런 사람은 확실히 남에게는 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과연 자기 스스로에게도 '착한 사람'일까? 모든 사람에게 맞춰주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은 항상 소외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울고 있는 내면 아이의 울음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된다.




'거짓 자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욕구와 감정에 둔감해진다. 소외되지 않고 인정받고 수용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동안 '거짓 자기'는 점점 더 비대해지고 '참 자기'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이들은 남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자기 욕구를 채울 새가 없다. 자기를 깎아가면서 애썼으니까 '모두가 행복했답니다'라는 결말로 마무리되면 참 좋을텐데 슬프게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의 감정을 내 감정보다 먼저 챙기고, 남의 욕구를 내 욕구보다 먼저 챙기는 동안 미루어뒀던 욕구와 감정들은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치 빚처럼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인다. 일단 이 일이 급하니까 나는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이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먼저 돕고 나는 나중에 생각하자, 나도 힘들지만 이 사람은 더 힘들어하니까 나는 나중에 챙기자..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게 언제나 '나중에, 나중에'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습성은 나이를 먹어가며 사회적 역할이 하나둘씩 더 추가되는 동안 더욱 심화된다. 이기적이어도 되는 유일한 시기인 유아기에도 자기를 주장하지 못했던 사람이 과연 직장인, 엄마/아빠, 딸/아들, 며느리/사위 같은 묵직한 옷을 덧입고 나서 그게 새삼 가능해질까?


한 방울 한 방울씩 미뤄둔 욕구와 감정의 빚은 어느새 큰 댐을 가득 채운다. 수위는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올랐다.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는 댐이 무너지지 않도록 잔뜩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바가지의 물로도 댐이 넘칠 지경이 되었으니까. 지나가다 툭 던지는 시부모의 말에 물이 출렁인다. 보고서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팀장의 얼굴에 물이 또 출렁인다. 별거 아닌 일인데 왜 내가 이렇게 동요할까. 수문을 열어서 물을 좀 흘려보내야 할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손을 댔다가는 댐이 무너질 것 같다. 무엇보다 암담한 것은 오랜 세월 수문을 열지 않고 물을 가두어두는 동안 수문을 여는 방법을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삶은 외롭고 괴롭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고야 만다."고 말했다. 불쑥불쑥 올라왔던 나의 어두운 감정은 댐의 물이 가득 차 출렁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는 아니었을까. 내 감정을 알아주라는, 내 생각을 알아주라는 나 자신의 외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물론 내 마음대로만 할 수는 없다. 생계를 위해 밥벌이도 해야 하고 이런저런 역할을 해내고 여러 사람들과 맞추어 살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 항상 '내'가 단단히 서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내가 먼저여야 한다. 남에게만 좋은 것 말고 나 자신에게도 좋은 것을 하자. 자기를 돌보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지고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작은 것부터 출발하면 된다. 어쩔 수 없이 명절에 전을 부쳐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부추전을 부치자. 죄책감 없이 칼퇴하고 퇴근 후에 업무연락은 받지 말자. 만나면 편안한 친구에게는 먼저 연락하고, 불평만 늘어놓아 진을 빠지게 하는 친구와는 거리를 두자. 여럿이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말하자. 작은 것부터 나를 돌보자.


자기를 알아주면 욕구가 해소되면서 댐의 물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댐의 수위가 낮아질수록 터져버릴 것 같은 압박감은 사라지고 마음을 그대로 두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나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유일한 친구는 바로 나 자신이다. 부모도 남편도 친구도 자식도 생의 어느 부분을 함께할 뿐이지만 오직 나 자신은 나의 모든 인생의 순간을 함께할 유일한 존재다.


나 자신을 더 이상 혼자 울게 두지 말자.

'참 자기'로, 진짜 자기로 살아가자.


ⓒevgenii_v, 출처 adobe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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