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은 나는 없다

존재 자체로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by 조이

감정을 있는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과의 관계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참고 참고 또 참다가 급기야 터져버리기 직전에 이르렀던 나의 감정의 댐은, 드디어 수문을 열고 감정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댐 밑에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네스 호의 괴물이야기처럼 댐 속에는 시커먼 무언가가 있었다. 물이 점점 빠지면서 드러난 그것의 실체는 '수치심'이었다.



반복된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은 아동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음부터 본질적으로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원초적 수치심'을 갖게 한다. 우유를 카페트에 엎질렀다든지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다 다쳤다든지 해서 혼이 나더라도 아이는 죄책감은 느낄지언정 수치심은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은 비교적 쉽게 해소될 수 있다. 문제행동에 대해 눈물 쏙 빠지게 야단을 맞았더라도 앞으로 행동을 수정하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에.


하지만 수치심은 다르다. 수치심은 어떤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그릇된 핵심감정을 만든다. 아동기에 양육자로부터 무시, 방임, 학대를 경험한 경우 아이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아이는 태생적으로 자기의 우주인 부모를 부정할 수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 차체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아이의 핵심감정이 되어 마음 깊숙이 자리 잡는다. 자기 존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큼 괴로운 생각이 또 있을까? 이제 이 아이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슬프게도 원초적 수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큰 성취를 이루고 아무리 많은 인정을 받아도 갈증은 그칠 줄 모르고 배고픔은 멈출 줄 모른다. 이들은 인정강박과 자기 이상화에 빠진다.


'나는 존재 자체로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고!'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을 갈아 넣는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모든 아이는 그 자체로 사랑받아야 한다. 잘나서 사랑받을만하고 못나서 미움받을만한 아이는 없다. 하지만 존재 자체로 수용받아본 적 없는 가여운 이 아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용받기 위해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지금 이대로는 안돼.'를 되뇌면서. 이 정도 성취라면 아무도 나를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정도 인정이라면 모두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은, 그 지점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린다.


이들은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과도한 성취, 과도한 인정에 매달린다. 자기 자신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동안 이들은 실제로 성취와 인정을 얻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그들의 텅 빈 마음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원초적인 수치심은 인정과 성취에서 오는 만족감을 느낄 새도 없이 금방 새어나가게 만든다. 이들은 끊임없이 존재 자체에서 오는 본질적인 결핍감에 시달린다.




내 생각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 나가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열심히 또 열심히 했다. 내 에너지와 체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나는 관계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많은 사람과 깊이 친해지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친화력이 있던 나는 비교적 쉽게 친구를 사귀곤 했는데, 가끔 다른 애하고는 친한데 나하고는 그냥 그런 친구를 만나면 자책을 했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었으면 쟤도 나를 더 좋아했을까?'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요구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유능해야 하고 똑똑해야 하고 친절해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어떤 기분인지는 전혀 상관없었다. 나는 땅땅땅 못을 박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된다고 말이다.


대학 때 교내 공모전 준비를 했을 때 일이다. 스스로를 계발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나는 바쁜 4학년 때 짬을 내어 친구와 함께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다. 하필 공모전 준비 기간과 시험 기간이 겹쳐 친구와 밤샘작업의 투혼을 발휘한 끝에 우리는 공모전에서 1등을 했다. 부상으로 노트북을 받고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이 말했다. '자, 이제 다음은 뭐 할 거야?'



원초적 수치심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해내자마자 그다음 과제가 주어진다. 그 과제를 하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놈의 자기 계발은 언제 끝이 날까. 혹시 이 자기 계발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이 내가 죽기 전 눈 감는 그 시점은 아닐까. 나는 이 자기 계발 프로젝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정말로 이제는 '멋지게'가 아니라 '즐겁게' 살고 싶어졌다.


내가 원초적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내 안에 깊고 어둡게 깔린 그 감정을 찬찬히 관찰했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노력 또 노력, 참고 또 참기를 하면서 살았구나. 그리고 생각해 봤다. 내가 과연 존재 자체로 잘못된 사람인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어린 나 자신을 눈앞에 두자, 내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존재 자체로 잘못된 아이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잘못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랑스러운 존재지만 사랑받지 못했던 가여운 상황이 있을 뿐이었다.


자기 수용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내면아이를 돌보는 작업과 비슷하다. 나 자신과 그런 나를 지켜보는 나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대로는 안된다며 끊임없이 그다음 과제를 던져주던 감시자 같은 나 대신, 나의 상태와 기분을 살펴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록 격려해 주는 친구 같은 나와 사귀어보면 어떨까.




나는 나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수용하기로 했다. 나는 적당히 엉성하고 또 적당히 꼼꼼하다. 나는 적당히 털털하고 적당히 소심하다. 나는 적당히 감성적이고 또 적당히 이성적이다. 나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 그냥 그게 나였다. 평가 없이 판단 없이 그냥 바라본 나는 생각보다 괜찮고, 또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냥 보통의 사람이었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웃었다 울었다 하는 보통의 사람. 그리고 나는 그 보통의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맛에 둔해서 아무 음식이나 잘 먹지만 맛에 둔한 이유로 요리를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한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성격이 활발해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만 한편으로 상처도 잘 받는 나를 사랑한다.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여섯이나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와 왜 힘들지 하고 의아해하는, 나 자신에 둔한 나를 사랑한다. 아픔이 있어서 고통스러웠지만 아픔을 겪었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나를 사랑한다.


실패하고 상처 입고 아픔이 있었어도 괜찮다. 어떤 무엇도 우리가 존재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음껏 실패하고 마음껏 상처 입고 마음껏 아파해도 괜찮다.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로 고귀하고 사랑스럽다.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이제 그만 밀어붙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보자. 자기 돌봄과 자기 수용을 통해 내내 움츠러들었던 내가 비로소 웃으며 어깨를 펴고 걸어올 것이다.


ⓒMustafa, 출처 adobe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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