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정원, 민우
수강 신청 날이 되면 대부분 대학생은 아침 일찍 피시방으로 향한다. 컴퓨터 화면 한편에 초시계를 띄워놓고, 신청 버튼을 오십구 초에 눌러야 하는지, 정각에 눌러야 하는지 고민한다. 원하는 강의를 수강하지 못하게 되면 인터넷 속도를 의심하며 괜히 버튼을 여러 번 클릭해보기도 한다. 텅 빈 시간표와 대기열에 놓인 강좌를 바라보면, 자신이 내는 등록금의 막대한 비용과 수업의 양과 질을 비교하며 억울한 마음에 휩싸인다. 강의를 듣기 위한 고군분투는 개강 이후 수강 신청 정정 날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외치게 된다. 막대한 등록금을 내고도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것이냐고. 단 한 번의 신청으로 원하는 강의를 전부 수강한다는 건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어째서 우리는 원하는 수업을 듣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가.
그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인 지난 8월, 본교의 25학년도 2학기 수강 신청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수강 신청 시작 삼십 분 전까지도 로그인은 물론, 접속 자체가 불가했다. 로그인에 성공했더라도 ‘대기열’에 놓여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과연 이러한 오류가 단순히 어쩌다 한 번 재수 없이 일어난, 시스템 구축만의 문제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한국 사회가 대학에 부여한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학교’, 그 교육기관으로써의 이름과 달리 한국에서 대학은 취업을 위한 등용문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대학은 소위 말하는 대기업, 공기업에 취직한 동문의 수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플래카드를 걸고, 그 순위에 집착한다. 취업과 관련된 교양 수업을 필수 수강 과목으로 선정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취업에 유리한 기술과 실용 지식을 배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학생들은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이 되기 위해 특정 학과에 진학하거나 복수 전공하며 ‘스펙’을 쌓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학문을 배우기 위한 교육기관이 아닌 취업을 향한 관문으로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취업에 유리한 학과와 수업에 수요가 집중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학과는 정원이 줄거나 폐과 위기에 놓이며 개설 강의 수도 줄어든다. 결국 수강 신청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을 교육기관이 아닌 취업의 도구로 바라본 사회 구조의 문제에 있다. 따라서 한국 교육 환경의 문제점과 그로 인한 교육의 위기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당신 이전의 경제(1961-1970)
대학에 진학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현대사회다. 대학에 가지 않는 선택지는 없는 듯, 고등학교에서는 지망하는 대학 순위를 조사한다. 선생님은 장래에 관한 상담이 아닌, 입시 상담을 진행한다. 이러한 사회의 풍토를 명시하듯, 2024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대학 취학률은 74.9%1)다. OECD 국가의 평균인 45%2)와 비교해 상당히 높은 수치다. 1980년에는 15.9%3)에 불과했던 취학률과 비교한다면, 단기간에 급격히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요컨대 국민 대다수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위해 소비할 수 있을만큼의 경제적 요건이 갖춰졌다는 뜻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을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처참했다. 일본의 오랜 식민 지배와 더불어 1945년부터 오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1960년 한국의 1인당 GNP(gross national product, 국민총생산)는 79달러로, 125개 국가 중 101위로 최하위였다. 국내 민간저축은 GDP(gross domestic product, 국내총생산)의 5%4)로, 국민이 따로 저축할 여력 없이 당시의 생계가 최소한의 자본으로 생존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정부는 빠른 경제 성장과 안정을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차부터 6차5)까지, 무려 삼십 년간 이어진 계획 중에서도 교육 제도 개편과 대학 진학의 토대가 되는 제1차(1962-1966), 제2차(1967-1971) 계획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제1차는 경공업 중심의 체제였다. 섬유, 의류, 가발 등을 생산하고 수출하며 본격적으로 국제시장을 노렸지만, 그 단가가 낮아서 수출량이 많다고 해도 자본 확충에 한계6)가 있었다. 더불어 당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경공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에 타국과의 경쟁이 심화한다면 시장 내 위치를 선점하기 어려웠다. 즉, 경공업은 장기적으로 성장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는 제2차, 화학과 철강, 조선 등의 중화학공업으로 산업 체제를 전환했다. 복잡한 기술과 공정이 필요하므로 기술 인력 양성과 그에 따른 연구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는 곧 국내 기술력 강화로 이어졌다. 중화학에 필요한 산업 기반을 국내에서 만들어 자체 생산했기에 외국으로부터 원자재와 생산 수단을 수입하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960년에는 19.9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내총생산이 1970년 82.4달러로, 약 4.2배나 상승7)했다. 중화학공업의 확대로 경제는 점차 안정되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창출되고 그에 따라 임금이 조금씩 상승했다.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가능해진 것이다. 중산층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지속적인 소비 능력을 지닌 계층이다. 그들의 소비는 필수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의료, 여행, 가전, 교육 등에 투자하며 경제를 활성화한다. 이는 곧 내수 시장을 견고히 만들고 확장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무엇보다 중산층은 소득세, 재산세, 부가가치세 등을 꾸준히 납부한다. 고소득층의 비율은 낮고, 저소득층은 세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은 국가의 안정적인 경제 기반이 되어준다. 세금은 국가의 재정 상태와 더불어 사회 복지와 관련이 있으며, 복지는 빈곤 완화 효과와 계층 이동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로 작동한다. 요컨대 복지가 중산층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투자’로 기능하는 것8)이다.
이러한 중산층의 출현으로 인해 당시의 한국 역시 안정적으로 국가 경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의 빠른 성장과 가능성을 확인한 정부는 이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여 더욱 발전하고자 했다. 따라서 국가는 ‘중화학공업화교육’9) 정책을 펼쳤다.
기술자 양성에 초점을 맞춘 교육 제도 개편은 이공계 대학의 학과 인원 증원, 실업전문학교와 공업고등학교 증설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에게 있어, 국민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국가의 경제 부흥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실업계 학교를 증설하면서 국민의 학력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펼치는 듯했지만, 궁극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기술자 양성이었다. 1973년 경제기획원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계 인력을 1981년에는 237만여 명까지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전 국민의 과학기술화를 강조했다. 이에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기획단 김광모 전 부단장은 ‘기술자 양성을 위한 교육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중략) 질적, 양적인 신 양성제도가 필요하고, 고급기계공장에서는 기계 가공사의 50%가 대졸’10)이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즉, 개편된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고등교육 이상의 학력자 양성과 공업 기술자 확충인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혁의 결과, 1970년에는 28.91%에 불과했던 고등학교 취학률이 1980년에는 63.85%로 대폭 증가11)했으며, 1975년에는 9.3%였던 대학 취학률은 소폭이지만, 오 년 만에 6.6% 증가12)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기업과 공장은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조건을 내걸었고, 임금이 높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대학교 졸업 이상’ 학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경제 전문가 ‘야마다 잇페이’는 당시 한국의 교육 정책 계획을 살펴보며, ‘한국처럼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노동력을 활용하여 공업화를 추진하는 국가에 있어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한 교육의 정비, 확충은 발전의 핵심’13)이라고 언급했다. 다만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수단으로써 교육을 이용한 정책의 부작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야간 학교의 증가, 실업전문학교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 시 주어졌던 혜택 모두 미래 자원 확보를 위한 산업화 정책에 불과했다. 이러한 교육의 수단화는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당신 이전의 교육(1970-1993)
당시 대학 입학 정원은 대학 진학 희망자에 비해 약 삼십만여 명 정도 적었다. 합격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사교육 열풍이 불었다. 이를 파악한 전두환 정권은 ‘7.30 교육개혁’14) 을 추진하며 본격적으로 학력자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일정 수준을 넘겨야 졸업이 가능한 ‘졸업정원제’를 실시하여, 1970년대에는 이십만 명에 불과했던 대학 입학 정원15)을 십만여 명 이상 증가16)시켰다. 그러나 이미 입학한 학생들을 중간에 제적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17)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대학 취학률을 상승시키는 정책이 되었다. 또한 중화학공업 체제를 의식하며 늘어났던 실업계 고교의 수를 감소시키고, 인문계 고등학교의 수를 증가18)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늘어난 인문계 고등학교의 수업은 당연하게도 대입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정부는 그동안 시행되었던 대학별 입학시험-본고사-를 폐지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학력고사 제도를 도입하며 공교육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학력고사로 입학시험이 개편됨에 따라 전국단위의 일률적인 평가가 가능해졌다. 이는 곧 점수에 따라 나뉘는 대학 입학의 서열을 공고히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필기고사 320점 만점에서 2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갈 수 있는 대학은 ‘명문’이 되었다. 그에 따라 높은 임금의 대기업과 전문 직군의 회사들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지원자의 출신 대학이 상위권 학교인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점점 높아지는 경제 수준, 변동하는 산업 체제, 다시 한번 맞이한 교육 정책의 변화. 이른바 ‘블루칼라’ 직군의 기성세대는 이러한 상황을 이미 겪었다. 그들에게 있어 교육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계층 이동의 수단이었다. 그 수단이 이번엔 높은 학력의 좋은 대학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성세대는 자녀 세대가 망치 들고 땀 흘리며 노동하는 대신, 연필 잡고 책상 앞에 앉아 노동하는 ‘화이트칼라’ 직군을 갖기를 바랐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좋은 대학은 필수 조건이었다. 그를 반증이라도 하듯 1989년 대학 진학률은 36.4%로 상승19)했다. 따라서 당시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한두 점 차이로 갈리는 명문대 입학의 당락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학력고사의 목적과 평가 방식이 문제였다. 학력고사는 고등학교 교육 과정 전체를 착실히 따라왔는지 확인하기 위한 제도였다. 시험 문제는 모든 교과목의 내용을 외워야지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암기식 문제가 출제되었으며, 철저한 상대평가 방식을 따랐다. 당시 정부가 학원과 과외를 불법을 지정해놓았는데도 학생들은 학원에 다니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집 안에서는 불법 과외가 성행했다. 공교육의 영향력을 극대화한다는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교육의 수단화와 사교육 열풍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전 정권의 문제를 인식한 김영삼 정부는 근 십 년간 이어지던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1993년 ‘신교육체제’를 수립했다. 학생이 자신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중심 교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에 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수학(修學) 능력을 지녔는지 파악할 수 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으로 개편한 것이다. 등급제로 개편하여 절대평가 방식을 혼용한 수능은 학력고사의 단점을 완화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수능 역시 정해진 담을 찾고, 정해진 풀이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암기 중심의 출제는 같았다. 또한 학교에서 배운 특정 부분이 수능에 출제되느냐, 않으냐의 선택적인 교육 과정이 학교 수업을 수능 대비 교육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이러한 입시 경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과 깊이 관련된 교육은 대한민국 청소년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시험 한 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인식은 기성세대가 겪었던 계층 상승의 꿈과 맞물린다. 그 과정에서 수능은 더욱 절대적인 제도가 되어간다. 전국단위의 평가 방식과 그 성적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교육을 한 층 더 수단화시킨다. 다만 과거의 입시 경쟁이 산업화 사회에서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오늘날은 더 잘 살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생존 본능이 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좋은 대학에 이어,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고 매달린다. 따라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입시 제도가 개인의 삶을 전체를 어떻게 좌우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지난 2024년, 전국 고등학생의 학업 중단율이 최고치를 기록20)했다. 내신 성적이 저조함에 따라 고등학교 자퇴 이후 검정고시로 학력을 인정받고, 수능에 ‘올인’하는 것이 또 다른 입시 트랙으로 자리21)잡은 것이다. 내신 등급이 낮으면 학교의 교과 과정을 따라가기보다 수능 시험에 집중하는 학생들을 ‘정시 파이터’라고 칭했다. 그 기괴한 형태와 별칭이 고등학교 자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어째서 ‘학교’를 중단하기 시작한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입시 제도가 개편된 이후에도 여전히 입시 경쟁은 치열했다. 이를 파악한 김영삼 정부는 수능 개편 이 년 뒤인 1997년에 대학 수시 모집을 시행했다. 수시는 고등학교 내신과 비교과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입학 전형이다. 당시, 정시와 비교해 수시 모집 비율은 1.4%에 불과한 낮은 비율22)이었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수시 비중을 대폭 증가하는 정책23)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학력고사 때부터 이어져 온, 단 한 번의 시험이 좋은 대학과 좋은 회사를 결정짓는다는 사회 불안을 잠재우고, 과열되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함이었다. 이후로도 정권에 따라 수시 제도에 작은 변화24)들은 존재했지만 2007년, 대학별 수시 모집 비율이 51.5%25)를 차지하며 정시를 압도했다.
수시 입학 제도는 학생들을 수능 시험과 그로 인한 주입식 교육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학생의 잠재력을 판단하는 제도인 듯 보인다. 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수시 비중은 학생을 더욱 압박할 뿐이다. 학생부교과전형은 고등학교 삼 년 동안 있는 열두 번의 시험에서 단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학생이 올곧게 상위권이거나, 점차 상승하는 성적을 보이는 ‘노력형’, ‘성장형’이기를 바란다. 학생부종합전형은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자신의 향후 이십 년 계획을 세워, 특정 학과에 진학하고, 특정 직업을 갖고, 특정 목표를 가지고 살 것을 강요한다. 학생은 대학에 가기 위해 비교과 활동을 진행하고, 관련된 동아리에 입부하며, 각종 공모전과 대회에 나가서 수상하는, 성과를 보여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내신 성적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정시까지 준비한다.
더욱이 수시 제도는 불평등을 명확하게 구조화한다. 내신 관리, 비교과 활동, 포트폴리오 준비 과정은 학생의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이 더욱 중요하게 작동한다. 최근에는 학생부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하 세특)까지 사교육 시장에 편입되었다. 단순히 학생의 자기소개서와 보고서의 문장을 다듬는 수준이 아닌, 전문 컨설턴트가 학생의 희망 대학과 학과에 맞춰 교과목과 연결될만한 주제를 직접 기획하고, 세특에 기록할 수행평가, 독서 목록, 발표 주제까지 설계해준다. 그 결과, 고등학생이 교과목 발표에 대해, 대학 학부생이나 석사 과정생 수준의 소논문을 작성해 들고 나오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학생이 스스로 발표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특 컨설팅이 아니더라도, 학원과 부모님 등 주위 어른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이다. 학생은 남이 써준 것을 읽는 ‘인형’에 불과하다. 학생 본인이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고, 탐구심이 있어 발표를 준비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구조에서 경제력이 있는 집안 학생들은 ‘완벽히 설계된 세특’을 확보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수시 경쟁에서 그대로 밀려난다. 이 격차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계층의 이동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지는 학벌 격차로 이어진다.
2024년 기준, 초중고 학생들의 사교육 총 지출액은 29조 2천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지출액은 47만 4천 원에 달한다. 소득이 높을수록 격차는 더욱 커진다. 월 소득 800만 원 이상의 가정은 자녀 1인당 평균 67만 원 이상을 사교육에 투입하지만, 300만 원 미만의 가정은 20만 원 남짓26)에 그친다. 즉, 같은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것이다. 예컨대 대치동에 사는 학생은 일대일 과외, 모의 면접, 최신 입시 자료를 맞춤형으로 지원받아 시험 준비를 한다. 반면, 지방에 사는 학생은 인터넷 강의와 EBS 강의에 의존해 공부한다. 그들 역시 과외와 학원을 다니기도 하지만, 대치동에 사는 학생과 같은 입시에 대한 정보와 일타 강사들의 ‘시크릿노트’를 얻을 순 없다. 두 학생 모두 ‘열심히 했다’고 평가받지만, 그 열심의 조건과 환경은 전혀 닫르다. 따라서 입시의 결과를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불공평하다.
이 불공정한 구조 속에서 특목고, 과학고, 자사고 진학 열풍이 뜨거워졌다. 특히 과학 인재를 육성하겠다며, 국가가 학비와 기숙사비까지 저액 지원하는 과학고의 현실은 참담하다. 과고를 졸업한 상당수의 학생이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로 진학27)한다. 규정상 과학 계열의 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로 진학한다면 학생이 그동안 지원받은 비용을 전액 반환해야 하지만 학부모들은 그 금액을 흔쾌히 지불28)한다. 의치한약 계열 진학이 보장하는 안정된 삶과 사회적 지위가 과학 인재 양성이라는 제도적 목표, 혹은 자녀의 학문적 열의보다 더욱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과학고가 사실상 국가 지원을 등에 업은 ‘의대 준비 학교’로 변질되는 현실은, 특정 학과 쏠림 현상이 얼마나 팽배해졌는지 확인시켜준다.
결국 사람들의 열망은 ‘좋은 대학’ 자체가 아니라,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로 집중된다.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같은 의학 계열이나 반도체, 인공지능, 같은 이공계 학과에 진학하면 곧,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평가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평가는 실제 노력이나 능력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경제력, 교육 자원, 부모의 지원이 보장한 배경은 지워진 채, 특정 학과 진학은 곧 능력과 성실함의 상징 자본으로 둔갑한다. 사회는 이런 구조를 당연시하며, 특정 학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특정 학과로의 쏠림 현상은 단순한 진학 트렌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직업을 서열화하고, 능력을 학벌로 환산해버린 구조적 산물이다. 대학과 학과 선택은 학문적 회심이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 변해버렸다. 그 결과 대학은 학문을 위한 공간이 아닌, 사회적 위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관문으로 전락해버렸다.
잘 살고 싶다는 열망은 언제부턴가 생존의 문제로 변질하였다. 대학과 학과는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나 개인적 호기심으로 선택할 수 없는, 앞으로의 삶을 위한 긴중한 문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학과 학과가 취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저 ‘대학’과 ‘학과’일 뿐인데, 무엇이 이를 생존의 문제로 작동시키는가.
대학과 학과의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인생 궤적을 대변하는 표식이다. 예컨대 ‘의대 진학’은 단순히 의학을 공부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 말은 곧 안정적인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는 증거로써 소비된다. ‘이공계 진학’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적 호기심이나 지적 탐구심을 충족하기 위해 이공계에 진학했다는 의미로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다. 이는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과 전문 지식을 습득했음을, 따라서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기호로써 작동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곧 능력 담론으로 귀결된다. 능력 있는 사람은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나왔다. 그 자체가 성실함과 재능의 증거이다. 반대로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했다는 낙인이 찍힌다. 마치 성공한 인생은 오직 하나의 길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회는 특정 대학과 특정 학과만을 능력의 증거로 삼는다. 능력이란 개인의 성향이나 잠재력 또, 다양한 분야에서 발휘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취업 가능성으로 환산되어 계산된다. 이러한 능력 담론은 마치 주식 시장에서 특정 종목의 가치를 숫자로만 평가하는 것처럼, 인간의 가능성과 삶의 의미를 오직 취업률과 연봉으로 환산시켜버린다. 인간은 숫자로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담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이어 ‘좋은 학과’에 몰린다. 학생들은 학문적 열망보다도 생존 본능에 따라 선택한 것이다. ‘이 길을 가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라는 두려움은 단순한 욕망이 아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대학과 학과의 선택은 이제 인생 전체를 담보로 한 도박이 되었고, 그 도박에서 안전한 길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이 과정을 통해 어느 대학, 어떤 학과를 나왔는가는 곧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운명적 서사처럼 받아들여진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걔, 서울대 의대 갔대’라는 말 한마디면 그 아이의 노력과 능력을 쉬이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는 사실상 그 개인의 노력보다 사회가 부여한 상징 자본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학과와 같은 상징 자본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능력 담론은 학문을 선택의 자유가 아닌 생존 전략으로 전락시킨다.
취업이 잘 돼 몰리는 학과가 있다면 필연적으로 선호도가 떨어지는 학과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취업과 무관하거나, 단기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 학과들은 정원 미달과 폐과 위기에 내몰린다. 철학과, 사학과, 물리학과, 사회학과와 같은 순수 학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되었고, 지방 대학에서는 실제로 문을 닫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학문은 사회적 효용이 낮다는 이유로 홀대받지만, 사실 인간 사회의 근본적 성찰과 진리 탐구는 언제나 위와 같은 인문∙순수 학문에서 출발해왔다. 그런데도 지금의 대학 구조 속에서 이 학문은 ‘쓸모없음’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산업 현장에서 활용되는 지식이 아니기에, 돈이 되지 않기에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고등교육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대학이 앞장서서 순수 학문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대학은 교육기관으로써의 본분을 잊은 채 기업화되고 있다. 대학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을 정리하거나 통폐합하고, 취업률이 높은 학과를 앞세워 선발 인원을 늘리고, 새로운 학과를 개설한다. 취업률은 대학 서열을 매기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되었고, 대학은 그 지표를 높이기 위해 몸부림친다. 대학의 이러한 몸부림은 대학을 기업에 예속시켰다. 이는 기업과 연계된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로 취업이 ‘보장’되는 학과를 개설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반도체 시스템 공학과, 가천대 클라우드 공학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학생들은 입학 단계에서부터 기업과 연결되고,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는다. 이는 학생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대학이 학문을 팔아 기업의 하청 기관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학과는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하거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특정 기업에 맞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전용 공장에 불과할 뿐이다.
대학이 내세우는 언어는 점점 기업의 언어와 닮아간다. ‘높은 취업률’, ‘대기업과 협력’, ‘산업 맞춤형 인재 양성’과 같은 문구는 학문의 자율성이나 진리 탐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는 대학이 사실상 ‘사업체’임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등록금은 투자금, 학생은 고객, 학과는 상품이 된다. 좋은 학과는 ‘잘 팔리는 상품’이고, 그렇지 않은 학과는 시장에서 퇴출해야 하는 ‘불량품’이 된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의 전당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거대한 상업 기업으로 전락한 듯하다. 문제는 이 구조 속에서 학생이 소비자조차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비자는 원래 구매 선택권은 가지지만, 학생들은 체제가 정한 상품 중에서만 고를 수 있다. 원하는 학문이 있어도 그 학과가 없어지거나, 정원이 줄어든다면, 선택의 자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학생은 고객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상품화된 교육을 강제로 소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대구대학교 사회학과의 폐과를 들 수 있다. 대구대학교 사회학과는 2025년부터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2030년 졸업 후 폐과되는 수순29)을 밟고 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더 이상 할 수 없다. 호텔 관광 경영학, 에너지 배터리 학과 같은 대구대학교에서 ‘살아남은’ 학과에서만 공부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람이 비교적 적은 지방 대학교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도 비슷한 위기를 겪는 중이다. 동국대학교 사회학과는 수도권 17개 대학 중 전임교원 수 최하위, 개설 교과목 수 15위 등 모든 지표에서 최하위30)를 달리고 있다. 교원 충원이 되지 않아 학과 소멸을 우려하는 학생들은 TF팀을 꾸려 학과 존속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사회학을 공부하고자 대학에 왔는데, 다른 과와 통폐합시켜 더 이상 사회학을 공부할 수 없다고 '통보'받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이런 대학의 모습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규격화된 제품을 찍어내는 공장 같아 보인다. 조금만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량품으로 분류되어 버려지고, 오직 시장이 원하는 형태만이 살아남는다. 학문은 더 이상 다양성과 창의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대학은 학문을 길러내는 토양이 아닌 기업 논리에 맞는 인력 공급 공장으로 변질하고 있다.
취업을 위한 선호∙비선호 과와 대형∙소형과의 탄생과 소멸, 그 이면에는 거대한 권력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 다시. 지금이라면 가지도 않을 비효율적인 길로 등교하던 대학교에 처음 입학한 그 날로 돌아가보자. 학문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원대한 다짐을 하고 들어온 이도, 자신의 성적에 맞춰 들어온 이도, 공부에서 벗어나 맘껏 놀아보자는 일념으로 들어온 이도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모든 것은 국가와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열망’이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을 국가와 권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구조적인 것으로 과하게 해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대학에 들어갈지,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진학하지 않을 것인지, 진학한다면 어떤 과로 갈 것인지는 개인의 능력과 선호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는다. 개인의 선호와 능력이 사회와 독립된 개별적인 영역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선호의 형성과 능력의 개발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필자의 답은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이다. 앞서 보았듯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은 교육 제도와 사회 인식에 종속됐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직장을 보장 받던 시절에서부터 고착되어 온 학벌주의, 그리고 학연이 우리의 삶을 좌우했다. 국가 주도로 행해지던 체제로의 사고의 종속은 이제 기업의 역할이 되어 있는 듯 해 보인다. 우리는 자발적이고 기꺼이, 우리가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개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적당한 수단으로서 대학이 활용된다. 가령 “나 이런 대학에 들어갔어요. 학창시절에 열심히 산 학생인 거 알겠죠?”, “영상 만드는 대외활동으로 상도 받았어요. 저 현장에서 바로 일할 수 있어요.”와 같이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학교 졸업장과 줄글로 나열된 스펙들로 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나의 노력을 알아봐 줄 것이라고 철썩같이. 아니, 간절하게 믿는다.
이는 학벌이 계층 이동의 상당한 수단으로써 작동한다는 신화 때문이다. 여기서 계층 이동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장, 대기업으로의 취직을 의미한다. 급속한 경제 시절 국가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이 신화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우리는 기업이 입사 조건으로 대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고, 기업 연계 학과의 졸업생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목격했다. 신화가 재현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대학의 취업률 순위가 곧 서열로 기능하고, 특정 학과가 기업과 직접 연결되어 ‘취업 보장’을 내세울 때, 학벌 신화는 현실의 질서처럼 받아들여진다. 앞서 살펴보았듯 부모의 경제력이 사교육을 통해 자녀의 대학 진학을 뒷받침하고, 그 대학이 다시 안정된 일자리로 이어지는 과정을 우리는 반복해서 목격했다. 그 반복은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층의 대물림을 강화한다. 역설적이게도 학벌은 계층을 뛰어넘는 사다리가 아니라, 계급을 고착화하는 벽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개천에서 용’나기 위해서는 좋은 학벌과 학과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는 인식을 공고히 하는 데 충분했다. 학령인구 대다수가 좋은 직장으로의 취직을 위해, 계층 이동을 위해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선망하는 것이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등용문으로 퇴색된 모습이다.
현재 취업 사관 학교로 전락한 듯한 대학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 기원을 찾기 위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대학(大學)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고등 교육을 베푸는 교육기관.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31)라고 대학을 정의하고 있다.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문적, 인격적 도야를 이루기 위해 대학이 존재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점이 든다. 첫째, 왜 개인이 ‘국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둘째, 현재 대한민국의 중등∙고등 교육 제도는 진정 학생 인격의 도야를 위해 존재하는가?
첫 번째 질문은 역설적이게도 본 글 전반을 통해 비판한 ‘사회적 구조’로 답할 수 있다.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생성되는 부는 그 노력이 적용되는 사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32)라는 아벤트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개인의 성공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과 재능 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회의 자식, 국가의 자식으로서 주변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는 사회 속 개인은 생산자인 동시에 수취자라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 개인과 국가의 연관성이다. 그렇기에 나를 키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학문한다는 것은 ‘국가를 위해 돈을 벌어라’라는 주장 같아 보인다. 왜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것이 국가의 경제적 도야를 이루게 하는 것일까?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학을 기업을 위한 인력 양성소로 활용하는 모습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이 결탁하여 대학이 노동 현장에서 활용되는 실용 학문을 배운 학생들을 육성하고, 졸업 후엔 노동 현장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시대의 규율을 익히기 위한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우리가 시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다른 국가, 다른 사회,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지금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인력 육성형 교육도 받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학문한다’와 같은 주장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선 교육 제도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몇 가지 역할이 있다. 즉,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학문하는 것이 보편타당한 가치가 되기 위해선 국가가 초등∙중등 교육을 교육답게 제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업가와 노동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기술자 양성을 위한 교육 제도 개편, 취업률 중심의 대학 구조조정, 그리고 미성년자까지 노동 현장으로 내몰기 위해 개설된 특성화 고등학교는 국가가 얼마나 서둘러 ‘쓸 만한’ 노동자를 찍어내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교육기관은 ‘인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와 기업을 위한 인력 육성소로 전락했다.
이 문제는 두 번째 의문을 통해 이어진다. 이러한 교육 제도는 오로지 노동력 공급을 위해 운영될 뿐 개인의 인격적 도야를 위해 기능하지 않는다. 교육다운 교육이 무엇인지 섣불리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하나 확실한 건 ‘좋은 대학’, ‘좋은 학과’로 가기 위한 입시 공부는 아닐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그 기능이 얼마나 입시와 취업에 편향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현재 고등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는 교과목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국어, 영어, 수학, 탐구 중심의 수업이 일과 대부분을 차지33)하고, 이는 수학능력시험의 시험 과목과도 일치한다. 자아 성찰이나 공동체 의식을 기를 수 있는 ‘봉사활동’, ‘자율활동’, ‘동아리 활동’과 같은 수업이나 활동은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나 있다. 학벌 만능주의적 사고에 잠식된 학생들은 이런 활동을 ‘비교과’ 과목이라며 경시하거나,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한 ‘기록용 활동’으로 취급한다.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성찰하거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판단, 사회적 책임감 등의 교육은 교육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다. 즉, 중등 교육 기관은 대학 입시를 위한 준비 기관으로,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 여겨지는 현실이 고착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의 본래 목적이었던 전인적 성장, 즉 지식∙태도∙가치의 균형 있는 발달의 실현은 고려되지 않는다. 국가는 아이들에게 교육다운 교육을 제공하고 있지도, 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국가를 위한 인재가 되라는 것은 너무나도 권위주의에 물든 착취적 발상일 뿐이다.
중등 교육 기관은 대학 취학을 위한 준비 기관으로,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 변질된 이유가 무엇일까? 국가와 기업이 원하는 쓸만한 노동자를 만들기 위해 ‘똑똑’한 학생, ‘유능‘한 직원, ‘성공한’ 삶의 표준을 제시하여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이제 사람들은 체제에 의해 종속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인식의 종속을 자처한다. 인식의 종속은 몇 가지 신화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명문대학교에 가면 ‘능력’있는 사람이다.”, “명문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한 사람들이기에 좋은 직장을 보장받는 것이 마땅하다.”와 같은 것이다. 성공한 삶의 형태는 단편적이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의 길밖에 없는 듯 말이다. 이러한 신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해진 길에서 탈선하면 실패한 삶을 산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고, 공부에 별 뜻이 없어도 ”어떤 학과든지 일단 ’대학‘은 가고 보자“라는 인식을 고착시켰다. 이는 명문 대학이라는 허황된 위상을 높이는 좋은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허상의 명문 대학이라는 위상은 중등 교육 기관을 변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학 입장에서 중등교육의 변질은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인격적 도야보다는 대기업으로 취업을 할, 공시에 합격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을 학교로 더 많이 끌어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이것이 곧 대학 위상을 결정 짓기에). 철저한 대학 입시 위주의 중등 교육 과정에서 살아남아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은 내재화된 규율로 대학에 들어와서도 대학이 원하는 성과를 성취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중등 교육 기관, 고등 교육 기관, 기업, 국가가 모두 동일한 인재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인재란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대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내는 ‘쓸 만한 노동자’, 조직에 무조건 순응하는 ‘유순한 직원’, 체제의 논리를 내면화한 채 스스로 굴러가는 ‘길들여진 인간’이다. 그렇기에 좋은 성적의 학생이 필요할 뿐, 중등 교육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았거나 훌륭한 인격적 성장이 이루어진 학생은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자신이 진정 배우고 싶은 것은 찾은’ 학생도 대학 입시에서 요구하는 성적을 충족하지 못하면 학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지점이 아닐 수가 없다. 누군가 “그렇게 간절하면 국영수사과를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라는 속편한 소리를 할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 안 되는 점이 있다. 국가와 기업의 주도하에 만든 성공한 삶이라는 궤적에 올라타기 위해 학령 인구 75%가 대학에 취학하고, 엄청난 규모의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격차가 벌어진다. 수능 성적을 순전히 능력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좋은 교육 자료와 강사를 동원하여 공부한 학생과 집에서 혼자 ebs를 보며 공부한 학생이 같은 노력의 양을 투자했을 때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또, 학령 인구 대다수가 사회가 구성한 대학의 위계 중 상위권에 위치한 대학에 취학하길 원한다는 사실이다. 대학 별로 설치된 학과의 종류가 다르기에 자신이 배우고 싶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특정 대학으로 취학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천문학과의 경우 서울, 연세, 경희, 세종, 충북 등 전국 7개의 대학교에만 설치되어 있다.34) 천문학을 배우고 싶은 학생이 특정 과목 성적(예를 들면 국어)이 좋지 않아 본인의 관심사와 관련 없는 학과를 선택하는 일이 잦다. 배우고자 하는 학문의 학과가 국소적으로 설치된 경우 이와 같은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 ‘네임벨류’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관심사와 관계없이 입결이 낮은 과를 선택하여 취학하는 학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하는 모습, 관심 없는 학문을 대학 졸업장만을 위해 취학하는 모습 등을 통해서도 학문하기 위한 공간이었던 대학이 취업을 위한 졸업장 한 장만을 받기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취업을 위한 관례적 도구로서 전락한 이유를 구조적인 요인을 통해 살펴보았다. 오늘날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을 위한 공간’으로서 인식되지도, 기능하지도 않는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으로 여겨질 뿐이다. 대학은 학문하는 공간이 아닌 더 쓸만한 노동자가 되기 위한 자질을 쌓은 공간이 되어 있는 듯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학생들이 대학에서 ‘노동자의 자질을 쌓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도록 주도한 것은 국가와 기업이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과 경제적 환경을 고려하면, 대학이 사회 진출의 디딤돌로서 기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이 오로지 그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이 ‘쓸모’로 환산되고, 전공은 ‘취업률’로 평가되며, 학생은 성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산업 현장의 예비 인력으로 간주된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점점 더 사고하지 않는 공간, 질문이 사라진 공간이 되어간다.
이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책임은 단지 대학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만들어낸 합의이자 강요된 통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학을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여겨왔다. 명문대에 들어가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 그곳에서 졸업장을 받으면 곧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사교육 기회를 결정하고, 그 사교육이 다시 대학 입학을 좌우하며, 명문대 진학 여부가 미래의 직장과 지위를 판가름한다. 결국 대학은 계층을 뒤집는 사다리가 아니라, 기득권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재생산 장치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이 신화를 당연한 것처럼 반복 주입한다. 기업은 입사 조건으로 학력을 내세우고, 국가는 취업률을 대학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언론은 ‘명문대 출신 ○○ 기업 합격’이라는 기사를 쏟아내며 신화를 재확인해준다. 심지어 부모들조차도 아이들의 자유와 호기심보다 ‘좋은 대학’이라는 목표를 우선시하며, 이를 위해 사교육 시장에 기꺼이 뛰어든다. 이렇게 국가·기업·언론·가정이 함께 만든 구조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다. 학생들은 그 기계 안에서 제각기 부품처럼 끼워지고, 공장 라인 위에서 규격화된 ‘상품’처럼 길러진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선택은 곧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과 열정보다 체제가 정해놓은 성공의 궤도를 먼저 고려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단순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곧 사회적 생존과 계층적 안전망을 의미하는 제도적 관문이다. 그래서 대학을 향한 개인의 선택조차 사실상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개인의 욕망과 희망은 구조적 불평등 위에서 길러지고 조율되며, 결국 체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발현된다. 그렇기에 지금의 대학 문제는 결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공모해온 불평등의 구조 그 자체다.
자, 며칠 전 수강신청 날을 떠올려보자. 오전 10시, 단 몇 초 만에 성패가 갈리는 순간동안 학생들은 좋은 시간표를 확보하거나 원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막대한 등록금을 내고도 듣고 싶은 수업을 쉽게 들을 수 없다. 8월 초 진행된 동국대학교 25년 2학기 수강신청은 다중창 및 여러 서버 문제들로 인해 학생들의 원성을 샀다. 이번 수강신청이, 그리고 졸업 전까지 진행되는 당신의 수강신청이 어려운 이유는 단지 서버와 시스템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더 큰 이유가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선점하기 어려운 수업은 대개 공통 교양, 학점을 잘 주는 강의, 대형학과 전공 강의이다. 이는 취업을 하기 위한 졸업장을 얻기 위해,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의 졸업장을 얻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본인의 학문적 탐구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닌 빠르게 졸업하기 위한, 취업을 위한 수업을 듣는다. 수강신청 대기열 앞에서 애타게 클릭을 반복하는 모습은 결국, 우리 사회가 대학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학창시절 내내 ‘대학은 반드시 가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성적에 맞는 대학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성적에 맞는’ 대학이 동국대학교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취업과 사회적 안정이라는 기준에 맞춰 자신의 성적과 현실을 조율한 끝에 도달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혹은 여러 학기를 다닌 지금,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또 다른 사회적 통념에 발맞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사회 체제라는 새장 안의 새가 아니다. 정해진 궤도에 맞춰 움직이며,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목표를 향해 날도록 길들여진 존재가 아니다. 대학은 그런 ‘새’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장을 인식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묻고,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학문이란 너무나도 당연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질문하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구조 속에서 사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구조의 하수인으로 순순히 전락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1) 이동한, 「[2024 교육인식조사] 대학 진학 필요성과 사교육 인식」 『한국 리서치 정기조사 여론 속의 여론』, 2024.
2) OECD, 『Education at a Glance 2020』, 2021.
3) 김안나, 이병식, 「한국 고등교육의 보편화에 따른 대학 재구조화의 현황과 정책 방향」, 『한국교육개발원』, 2004, p. 417.
4) 구현우, 「박정희는 왜 산업화 정치에 몰입했는가?: 산업화 정치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아서」, 『행정논총 제57권 제3호』, 2019, p.14.
5) 박정희가 직접 집권하며 이어간 것은 4차까지지만,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박정희의 경제 개발 계획을 일부 이어받아 지속했다. 자세한 내용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참조. https://theme.archives.go.kr/next/economicDevelopment/reconstruction.do
6) 정시구, 「박정희 대통령의 1960년대 경제개발에 대한 연구」, 『한국지방자치연구』, 2014, p.5.
7) 국가통계포털, 1960년, 1970년 주요 지표, 단위는 억.
8) 신광영, 「사회민주주의 복지사상: 뮈르달 부부와 에스핑-앤더슨을 중심으로」, 『한국스칸디나비아학회』, 2006, p.5.
9) 박영구, 「중화학공업화선언과 1973년 공업교육제도 변화」, 『한국민족문화』, 2011, p.8.
10) 김광모, 전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기획단 부단장의 발언. 『한국의 산업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 지구문화사, 1988, p. 257. 재인용: 위의 논문 p.9.
11) 교육통계서비스, 『2001 교육통계 분석자료집』, 2001, p.117.
12) 김안나, 이병식, 「한국 고등교육의 보편화에 따른 대학 재구조화의 현황과 정책 방향」, 『한국교육개발원』, 2004, p. 417.
13) リーチュンH․山澤逸平, 「日韓経済発展比較ー要約と結論」, 『日韓経済発展比較論�, 総合研究開発機構, 1988, p.271. 재인용: 위의 논문 p.4.
14) 당시 정권은 대학 입학 정원이 대학 희망자에 비해 적었던 상황을 파악했다. 당시 국민은 대학 합격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사교육이 과열되기도 했는데, 정부는 이러한 현상을 해소하고, 학교 교육-공교육-을 정상화시켜 ‘건전한 인격형성’을 중시하는 교육 풍토를 조성하고자 했다. (국가기록원, 「7.30 교육개혁」, 『교육』)
15) 국가기록원, 「7.30 교육개혁」, 『교육』.
16) 오창민, 「전두환의 교육 개혁」, 『경향신문』, 2024.01.10. 접속일: 2025.06.01. https://www.khan.co.kr/article/202401102000005
17) 위의 기사.
18) 교육통계서비스, 「유초중등통계 각급 학교 개황」 『교육통계연보』, 1985.
19) 표주연, 「[1988 VS 2015④]지금의 성보라는 취업할 수 있을까」, 『뉴시스』, 2015. 12. 11. 접속일: 2025.06.06. https://v.daum.net/v/20151211060141478
20) 이상현, 「지난해 고교 학업중단율2.1% ‘22년래 최고’.. ‘검정고시 악재로 향후 이탈율 떨어지나’」. 『베리타스알파』, 2025.06.10.https://www.veritas-a.com/news/articleView.html?idxno=557797
21) 이도경, 「“자퇴 후 수능 올인” 강남3구, 고교 이탈 서울서 최다」, 『국민일보』, 2025.08.11.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54807727&code=11131300&cp=nv
22) 이별님, 「정시vs수시, 23년의 대결」, 『뉴스포스트』, 2019.11.13.https://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73762
23) 박홍기, 「새 대입제도 무엇이 달라졌나」, 『서울신문』, 2000.11.30. https://www.seoul.co.kr/news/2000/11/30/20001130025002
24) 김대중 정부 당시 수시 모집은 두 개 학기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노무현 정부에서는 수시 모집 학기를 2학기로 국한하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는 등, 수시라는 큰 틀은 남겨놓은 채 입시 제도는 지속되어갔다.
25) 이별님, 「정시vs수시, 23년의 대결」, 『뉴스포스트』, 2019.11.13. https://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73762
26) 통계청 및 교육부. 2025.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https://kostat.go.kr/board.es?mid=a10301010000&bid=245&act=view&list_no=435485
27) 노진규. 2025. “의대 쏠림에 과학고⋅영재학교 이탈 증가...정원 확대 영향”. 신아일보. https://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3817
28) 김은경. 2023. “이공계 서약한 과학영재들까지 의대 열풍”.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national/education/2023/01/26/UEA3EKIZZZFRZDP3YPUIX
29) 정지훈. 2024. 위기 속 지방대...대구대 사회학과 폐과 ‘장례식’. 연합뉴스TV. https://www.yonhapnewstv.co.kr/news/MYH20241109005300641?input=1825m
30) 남해인. 2025. “사회학과 위기? ⋯대구대 이어 서울권 대학까지 불어닥친 ‘폐과설’”. 뉴스1. https://www.news1.kr/society/general-society/5737904
3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대학”. 2025.08.20접속.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32) 라이언 아벤트. 2018. “노동의 미래-디지털 혁명 시대 일자리와 부의 미래에 대한 분석서”. 안진환 역. 민음사
33) 국가교육과정정보센터. 2022. “2022 개정 교육과정”. 2025.08.20.접속. https://ncic.re.kr/board/B0031.cs?act=read&bwrId=1271
34) 이우희. 2014. “‘별그대’ 열풍에 천문학과 새삼 ‘관심’”. 한국대학신문.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2778
35) 박기범. 2025. “채용조건형 계약학과, 무엇이길래”. 대전일보.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2922
36) 최경림. 2025. “취업률 저조... 문 닫는 인문⋅기초과학 학과”. 세계일보. https://www.segye.com/newsView/20250608507585?OutUrl=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