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테스와의 만남
자신의 거친 모습에 실망하며 자책하고 있을 때 여러 해 전 상담학에서 공부했던 칼 융의 참고도서가 떠올랐다.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다. 늑대 비슷한 모습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낭패스러움 가운데 있는데 여성은 원래 존엄한 늑대 족이란다.
여성 Woman의 어원도 Woe(늑대) + Man(사람) 이라니. 웃음도 나오고 위로도 되고 솔깃하기도 했다. 책의 첫머리부터 나를 휩쓸고 있는 낯선 정서의 많은 부분을 해석하며 괜찮다고 해주었다.
에스테스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빼앗았다. 꿀 송이 만난 듯 책장을 넘기다가 급기야 백일몽 속으로 빠져 들었다. 빽빽한 숲 속으로 늑대를 찾아 나서는. 큼직한 나무들 사이로 넝쿨을 헤치며 걷다가 신기한 표지판을 만났다.
‘늑대 가문 훈련학교’
반가움에 즉각 입소를 신청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사기진작을 위함인지 처음부터 쏟아지는 격려의 말들.
“당신도 예민하고, 장난스럽고, 강한 희생정신을 지니고 있고,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힘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모두 늑대의 성품이죠.”**
나처럼 늑대 가문의 성질이 많이 소멸된 사람은 기초부터 배워야 한단다. 교관이 처음 가르친 것은 우는 법이었다. 아주 큰 소리로 어미 늑대를 따라 골짜기를 향해 우 우(woe woe)하며 울어 보았다. 열심히 연습하니 꽤 그럴듯한 늑대 울음이 나왔다. 저 쪽 산에서 우(woe)하고 메아리치는 내 목소리가 낯설고 신비해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온 산천초목이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차 없이 이어지는 교관의 명령.
적시에 으르렁 거리고, 덤비고, 힘껏 치고, 도망치고, 숨도록 하라. 분노 때문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서 힘을 얻도록 하라. 창조적인 일에 쓰일 수도 있다. **
아니나 다를까 화가 날 때 화내며 으르렁 거리는 것은 정당한 거였다. 다만 거기에 계속 머물러 마음을 빼앗기거나 진을 빼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분노에서 힘과 창의력을 낳으라니!
다음 과정은 노래 부르는 것이었다. 숲 속 대자연 속에서의 열창은 꽤 낭만적이었을까? 아니다. 조금 무시무시했다. 로바 조상이라는 분을 그대로 따라야 했으니까. 까마귀나 수탉처럼 울며 이산 저산을 뛰고 강바닥을 훑으며 늑대의 뼈를 찾고, 강가에서 그 뼈를 모아 골격을 재구성하고, 그 옆에서 두 팔을 쳐들고 큰 소리로 보컬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 뼈들 사이에서 살이 붙고 털이 돋기 시작했느냐고? 아직은 아니었다. 노래가 아직 힘이 없고 그렇게 크지 못해서다. 그 옛날 옛적 뼈들에게 형체를 가져다준 로바의 우(woe) 울음은 얼마나 우렁차고 신비로웠을까?
늑대 가문의 규율도 배웠다.
** 영혼의 고향으로의 귀향을 경험한다. 그곳에 이르게 하는 수단은 음악, 예술, 숲, 물안개, 일출, 고독 등이 있다.
** 아니무스를 정기적으로 단련시킨다.
** 때때로 고독의 시간을 갖으며 영혼에게서 야성을 선물 받는다.
융 심리학에서 배운 여성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남성성, 아니무스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여성에게 논리적 사고, 용기, 결단력, 주도성을 주는 원천이다.
그 학교에서 강도 높은 프로그램을 끝내니 늑대 조상의 유산(遺産) 수여식이 있었다. 에스테스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라고 귀띔했다. 그 돌의 이름은 직관이다. 이성과 남성 중심 세계에서는 그렇게 큰 값을 쳐주지 않는.
직관은 늑대처럼 사물을 분석하고 고정시키는 발톱과, 외양을 꿰뚫어 보는 눈, 그리고 보통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다. --- 여성은 동물과 같이 기민하고, 거의 초인적인 예민함과 여성스러움을 지니며 자신 있게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
어느 날 드디어 들판에서 어떤 흔적을 발견했다. 전날 꿈속에서 얼핏 본 것 같은 여걸의 자취다. 늑대어미의 털과 발자국이 남겨진 흙에서는 젖 내음 보다 더 사랑스러운 향기가 났다.
** 여걸은 또한 근원, 빛, 밤, 암흑, 새벽이고, 좋은 진흙과 여우 뒷다리의 냄새이며,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새들의 주인이고, 우리를 이끄는 목소리이다.
** 여걸은 창조와 파괴의 주체로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정신이며 우리가 신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주위에 숲을 만들어 주는 존재다.
책장을 닫고서도 한참을 늑대와 함께 달리며 야생의 벌판을 누볐다. 메아리처럼 들리는 여걸의 목소리를 좇으면서. 완경 여성에게 펼쳐질 인생 2막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비밀이랄지 놀라운 반전이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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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사 에스테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부제: 원형 심리학으로 분석하고 이야기로 치유하는 여성의 심리. 손영미 옮김. 펴낸 곳: 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