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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을 찾아서

휴전협정과 새로운 질서

by 램즈이어

약 2년 정도 내면의 혁명군과 교전, 후퇴를 거듭하며 식구들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 같다. 마침내 두 자아(自我)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육체적으로 힘이 약간 생겼고 인격적으로는 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그게 그겁니다 하며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육신적인 강인함은 덜하지만 패기와 지혜로 무장한 낯선 여전사의 모습이랄까? 운명에 마냥 순응하기보다 개척해보고 싶고, 사물에 대해서 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깊이 묻혀있던 갈망들이 새 통치자를 알아챈 듯, 하나 둘 표면으로 튀어 올랐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평생 이기지 못하는 웬수, 영어에게 질질 끌려만 다니다니.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너, 이제 과감히 절교다. 영어 공부 더 이상 안 한다. 로망의 언어를 새로이 배우리라.

** 악기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그나마 조금 배운 피아노라도 살리려고 애쓰던 거 그만. 피아노 연습 스톱. 새로운 악기를 다뤄본다.

** 노랑이나 핑크 빛 옷, 못 입을 것도 없지. 이제부터 밝은 색 옷을 고르고 짧은 치마도 입어보자. 종아리가 굵으면 어떠랴? 하지만 어느 일본 작가의 조언대로 만화 캐릭터 티셔츠는 조심할 것이다. 소녀 적 귀여움이 그립더라도 중년 여성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주 노년이 될 때까지 참으라고 했다.

**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온전히 벗어난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지는 말고, 거절하는 법도 배운다.

** 인간관계에서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남편의 조언을 따른다. 만남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고 가지치기한다. 알고 보니 이것은 여러 고전에 이미 실려 있는 삶의 지혜였다. 손자병법에 무소불비 즉무소불과 (無所不備 則無所不寡)라고, 모든 곳을 지키려다 보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내용이 있다.#

몽테뉴도 ‘나는 소수의 일에만 열중하고 골몰한다’고 했다.##


내 안의 낯선 여성성은 에스테스의 책에 나오는 야성적 여성, 여걸 (Wild woman)과 닮아 보였다. 그녀가 작성해 준 늑대들의 생활원칙으로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갖가지 꿈들의 야자수가 무성한 섬을 향해 떠나보기로 했다.


늑대들의 생활원칙

1. 먹기

2. 쉬기

3. 틈틈이 방랑하기

4. 위풍당당함을 유지하기

5. 자식을 사랑하기

6. 험담은 밝은 데서 하기

7. 듣는 귀를 잘 조율하기

8. 살도 중요하지만 뼈에도 관심을 갖기

9. 사랑하기

10. 종종 큰소리로 울기 ###


호기롭게 꿈을 찾아 나선 초반에는 영원히 해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시작하는 짜릿함이 있었다. 강남역의 인파를 헤치며 종종걸음으로 학원을 향할 때 젊은 시절과 비슷한 경쾌함도 느꼈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가 만만치 않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신비한 섬에 닿기도 하지만 무시무시한 거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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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 최송목지음, 유노북스, 2024

##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 지음 정영훈 엮음 안해린 옮김, 메이트북스, 2019

###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 이루, 2013


** 대문의 그림 사진: JOAN MIRO <Metamorphosis 변형>1936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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