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친 전자 회로

생트집의 여왕

by 램즈이어

몸에 감정 기류를 조절하는 전자회로가 있어 어느 날 거기 원인 모를 오류가 생긴다면? 오작동을 고치느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배터리가 제 홀로 푸지직 거린다면? 완경 즈음 내 기분 시스템에서는 그렇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경질 적으로 꽥 소리를 지르는 횟수가 늘었다. 보통 때 늘 참아 왔던 일들이 참아지지가 않고 별거 아닌 일에도 화가 났다.

어느 날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큰아들이 또 빨래 감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샤워 미리미리 하라고 엄마가 몇 번 몇 번 말했니?”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그런데 중간에 빨랫감 넣는 버튼 있잖아요?”

“넌 엄마 힘든 거 안 보여?”

“죄송해요….”

아들들은 내 눈치를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엄마 요즈음 왜 저러셔?” 둘째가 형에게 물었다.

“갱년기시래. 조심해”

“갱년기가 뭔데?”

“그런 거 있어. 무서운 거.”


몸은 가난해졌는데 마음은 정 반대였다. 교만하며 신경질 많고 별일 아닌 것에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치에 맞지 않게 화내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하고 우스꽝스럽다.

감사하며 얌전했던 나의 원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욕구불만 가득해서 누군가의 멱살을 쥐고 한대 패려 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대책 없는 중 2 남학생의 기분도, 괜히 시비 붙는 깡패들의 마음도 넉넉히 이해되었다. 비슷한 족속이 된 것 같았으니까.

사춘기의 질풍노도에 버금가게 맘속에 쓰나미급 파도가 넘실대어, 그 감정의 크기로는 가정을 넘어 세상도 넉넉히 휩쓸어 버릴 것 같았다.

집 밖에서도 종종 화를 내는 경우가 생겨났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에서 일을 보는데 그날따라 순서가 잘 빠지지 않고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금방 들어와서 직원과 눈인사를 하더니 쓱 순서에 관계없이 일 처리를 하지 않는가? 불공정함을 참지 못하고 창구 직원에게 다가가 불 같이 화를 냈다.

“아니 삼십 분을 기다린 사람이 있는데…. 저분 VIP 인가요? 새치기를 받아 주시고.”

커다란 감정폭발은 무기처럼 어떤 힘이 있나 보다. 여직원은 금방 위축되어 변명하느라 쩔쩔맸다. 나를 무서워하는 어떤 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다른 인격이 되어 보는 미지의 경험이랄까. 이러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는 건가?

화내는 사람은 아주 잠깐 동안만 상대방을 압도하는 갑의 위치에 있을 뿐이다. 몇 분 후에는 엎질러진 불을 수습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찾아온다. 일일이 사과할 수도 없고….

남편은 낯선 아내의 분노에 처음엔 놀라다가 차츰 포기하고 이해하는 듯했다. 얼핏 겁을 내며 슬슬 피하는 기운도 느껴졌다. 눈빛에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서.

‘생트집 여왕에겐 잡히지 않는 게 상책이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