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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인 배추와 겁쟁이 줌마

도로시가 만난 겁쟁이 사자처럼

by 램즈이어

낮이 되면 싸움은커녕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몸에 힘이 주욱 빠지고 절여놓은 배추처럼 되었다. 아무리 푸릇하고 오동통한 배추라도 소금에 절여지면 억센 기운이 사라진다. “의지와 욕망을 모두 내놓습니다”하며 항복한 듯, 축 늘어져 얌전히 누워있는 모습이 가엾기까지 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속에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날 몸살 기운에 잠겨 있기도 한다. 체력은 이미 바닥이다. 누군가 운동 부족이라고 조언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밉던지. 운동 부족 상태가 맞기는 한데, 도대체 운동할 기운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강남 나들이 금지령이 내렸다. 지하철 타고 모임에 한번 갔다 오면 그 여파가 오래갔다. 여러 날 몸져누워 있으니 남편이 예방 차원에서 내린 명령이었다. 이제 제대로 친구도 못 만나는 건가? 9호선 애호가로 강북, 강서, 강남을 번쩍번쩍 누비던 때가 그리웠다.

40대 때 체력을 길러두지 않아 이렇게 폭삭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갱년기 증상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가끔 강철 체력이라는 말도 듣던 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링거를 맞았다. 한번 어지러우면 식사가 제대로 안 되어서다. 한 번은 일터에서 환자 보는 중에 갑자기 오심이 올라와 다른 방에 가서 왝왝거렸다. 간호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혹시 입덧?’하는 표정을 지었다. (완경 이행기에 드물게 임신되는 경우도 있다.)


“하는 일이라고는 두 세끼 차려 먹는 일밖에 없는데 힘들어 죽겠어요.”


이때 어느 갱년기 환자분의 넋두리가 참 위로가 되었다. 내 사정을 말하고 있는 듯해서다. 겉으로는 매일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도 골골거리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나가는 것이 그나마 몸 늘어지는 것을 막아 주어서, 또 여차하면 영양제를 맞으려고, 아침에 주섬주섬 집을 나섰다. 일터에 오면 기분전환이 되고 힘이 좀 났다. 이 시절 내 몫의 병원 진료를 파트너가 많이 떠안았던 것 같다.

김장 때 절임 배추는 하루 이틀 후 놀랍게 변신한다. 속이 다채로운 양념으로 채워지고 버무려지면 색깔도 화려해져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힘없이 축 쳐진 모습은 깡그리 잊히고 맛있게 아삭거림으로 기억되며.

나도 얼마 후에는 발랄한 색과 굳기를 다시 갖게 될까? 그때는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의 사정이 말이 아닌데 마음의 형편도 비슷했다. 무던하고 침착한 성격이었는데 별일 아닌 일에도 마음이 철렁하고 두근거렸다. 그동안 친분이 별로 없었던 불안이나 예민함의 정서와도 가까워졌다.

그때까지 교과서로만 알고 있던 폐소 공포증도 뒤 따라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교향곡을 듣다가 돌연 음악이 저 편으로 물러가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코너에 몰린 마음이 되어 그곳을 빠져나가려는데 양쪽으로 둘러싸인 자리다. 휴게 시간이 될 때까지 오도 가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렸다. 그 후 콘서트홀과는 헤어지는 수순을 밟았다. 더 이상 선율이 흐르는 사랑스러운 공간이 아니라서.

비행기 안에서의 답답함은 처음에 안정제로 다스렸다. 나중에는 셀프 인지 치료도 시도해 보았다. 비행기 환기 시스템을 공부하여,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자신에게 계속 중얼거리는 것.


“반 정도의 외부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병원 수술실 수준의 공기 정화 필터링을 한다. 2-3 분 만에 한 번씩 공기가 완전히 새로워진다.”


MRI 검사는 폐소 공포증이 있다고 하니까 수면 검사를 권유받았다. 하지만 자는 것도 뭔가 무서워서 안정제만 먹고 통속에 들어갔다. 귀마개를 하고 누웠을 때 뜻밖에 다양한 소음들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이 시끄러움에 정신이 팔려 공황을 겪지 않았다.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기 위해 코일에 순간적인 강(强) 전류를 흘려보내서 이때 생긴 진동이 내는 소리라고 한다. "따다다닥", "두두두둥", "쿵쾅쿵쾅" 등으로 주변이 야단스러우니 오히려 마음은 수월했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막무가내로 자리를 차지하는 줌마가 그리 밉지 않다. 카페에서 큰 목소리로 깔깔거리며 떠드는 분들도 성토하지 않는다. 혹시 도로시가 만났던 그 겁쟁이 사자 족(族) 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겁이 잔뜩 있어 사나운 허울을 보고 상대가 먼저 물러나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그래서 무서운 생각이 나면 어흥 하고 우는 거야. 코끼리나 호랑이나 곰이 나랑 맞붙어 싸우려고 했다면, 아마 난 달아났을 거야. 나는 그런 겁쟁이야. 그런데 내가 으르렁거리기만 하면 모두들 먼저 달아나 버려.” (p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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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 프랭크 바움 지음, 김석희 옮김 『오즈의 마법사』 (주) SIGONGSA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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