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십대 부터 이야기
갱년기 증세는 100세 시대 후반전의 팡파르인가 보다. 인생 2막의 시작을 기념하듯 특별하게 울려 퍼진다. 내 경우는 다소 시끌벅적했다.
20여 년간 가정의학과 의사로 갱년기 여성에 대한 상담과 진료를 해왔다. 어떤 질문을 해오건 잘 안내할 수 있었기에 자신은 이 기간을 사뿐히 넘어갈 줄 알았다. 그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게 찾아온 증상들은 갑자기 찾아온 토네이도급 회오리바람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지하실에 몸 숨길 틈도 없이 통째로 번쩍 들려 다른 차원의 나라로 던져졌다.
그 나라에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대신 이상한 혁명군, 절인 배추, 불면증 등과 마주쳤다. 낯선 녀석들과 친해진 뒤에는 나도 에메랄드 빛 꿈의 궁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오십 대의 마법사를 만나고 지혜와 사랑과 용기를 얻어 10여 년 만에 무사히 돌아온 이야기다. 도로시의 은빛 구두처럼 나도 글쓰기라는 신기한 도구를 얻어서 이 여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오십 대를 지나 온 지금은 자녀들이 떠난 빈 둥지 대신 글벗들의 둥지에서 소소한 소통을 하며 일을 하고, 첼로를 켜며 운동을 한다. 무엇보다도 자칭 색깔 있는 사람이 되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링거로 연명했던 오십 초반에는 의미 있는 인생의 활동이나 즐거움이 곧 끝나는 줄 알았다. 여성성을 잃어 좋은 시절일랑 영영 가버린 것 같았고, 인생 2, 3막에 설레는 스토리 일랑 없을 듯했다.
오십이 곧 다가오거나 힘든 갱년기를 겪고 있는 인생 후배들에게 그 후로도 얼마든지 활기찬 삶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적절한 전망(展望)을 알게 되면 이 시기를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50 세부터 10년 남짓은 자녀가 대학 입학시험을 끝내고, 나중에 결혼해서 첫 아이를 갖기 전(前)까지의 기간이다. 폐경 이행기의 전반부는 자녀의 사춘기와 맞물릴 수 있으나 어머니로서 가장 중요한 숙제인 입시가 마쳐지면 보통 완경을 맞는다.* 이때부터 다음번 과제 -조부모로서 손주 육아에 도움을 주는 등-가 안겨지기 전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다.
출산과 육아의 임무에서 벗어나 어찌 보면 여성으로서 인생의 제2 황금기다. 차분한 자유로움이 있는, 톤이 부드럽고 속도가 느린 또 다른 이십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등장한 ‘참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귀향길의 오디세우스가 무서운 키클롭스의 섬에도 닿았듯이 호기심과 꿈의 행로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불편한 손님도 찾아오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도 만났다. 음악으로 치면 고뇌와 환희가 번갈아 등장하는 놀람 교향곡쯤 될 것이다. 하이든은 부드러운 선율 속에 팀파니의 일격을 넣어 청중들의 졸음을 내쫓았다. 나의 오십 대 이야기는 화음과 불협화음의 굽이치는 멜로디로 놀라움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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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경'이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를 피하고 여성의 삶에서 한 단계가 '완성'되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 이 브런치북에서도 '완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다만 '완경'이 아직 학계의 공식적인 학술 용어는 아니어서 의학적인 전문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 한해서 '폐경(Menopause)'이라고 쓸 것이다.
* 폐경 이행기: 난소 기능이 저하되어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지면서 폐경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폐경으로 이어지는 시기. 보통 46세에 시작하여 평균 약 5년의 폐경 이행기를 거쳐서 폐경에 이른다. (대한폐경학회)
** 용어 정리
# 완경(폐경): 마지막 생리가 있은 후 다른 원인 없이 1년 동안 월경이 없는 상태
# 갱년기(climacteric): 완경 전 수년에서부터 완경 후 약 1년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는 좀 더 넓은 개념의 용어. 이 시기는 난소 기능이 점진적으로 저하되면서 여성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를 총칭한다. 폐경 이행기와 완경 시점 이후의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 갱년기 증상: 완경 전후에 나타나는 다양한 신체적, 정서적 증상들을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