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슬로건이 없는
그날 밤 새벽에 잠이 깼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불같은 뜨거운 것이 느껴져서다. 식도 부근에서 쓰림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 화끈 거리는 느낌이 일었다. 자주 앓는 식도염과 위염 증상이 떠올랐다
‘메운 것과 커피를 많이 먹었나?’
아무래도 그때와는 달랐다. 신체적인 증세 같기도 하고 마음의 느낌 같기도 했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이 실체를 이리저리 헤아려 보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 화기(火氣)가 식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더 깊숙이 마음 어떤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슴 부근에서 계속 확확거리더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이 증세를 다스려 보려 애썼는데 그 화는 오히려 점점 커갔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남편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은 너무도 평온하게 색색 자고 있어서, 나의 혼란과 그의 평화가 대비되었다. 잔뜩 약이 올랐다. 그 약 오름은 이유 없이 전의(戰意)를 생성하더니 내 속의 어떤 화약에 - 아마도 다이너마이트 급의- 불을 지폈다.
‘지지직 쾅!’
나는 그 폭발음과 함께 내 발로 남편의 다리를 힘껏 찼다.
“야잇! 선전포고닷!”
마음이 시원했다.
“이제 저쪽에서 어떤 반응이 오겠지, 그러면 더 세게 꽝 할 거야!”
씩씩거리고 있는데 그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으음…. 음~”
내게 발을 차였어도 남편은 다시 세엑 세엑 잠이 들었다. 내 발차기가 힘이 약해서 어떤 공격이라기보다 험한 잠버릇이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더 화가 났다. 싸우고 싶어 안달인 마음을 가장 돋우는 것은 상대방의 무반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감히 일어나지 않다니! 재공격이다. 야앗!”
이번에는 이불 둔덕을 맞췄다. 다시금 제대로 겨냥해서 발을 휘두르려다 말고 주춤했다. 화기가 식어 가며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서다. 몇 분 전의 마음속 폭발음이 생각나며 나 자신도 놀랐다. 상대방 다리를 조금 빗나간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뭘 하려 했었지?”
그 후 며칠간 밤마다 이런 일이 지속되었다. 가슴에서 화기(火氣)가 올라와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면서 전혀 근거 없는 적대감이 솟아오른다. 낮 동안의 소소한 못 마땅함이 눈덩이처럼 커지기는 하나 타당한 싸움의 슬로건은 딱히 없다. 이상한 전투심이 발동하고, 날이 새기만 하면 남편과 집안을 상대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리라 마음먹는다.
그러나 밤새 전의(戰意)를 다지며 마음을 불태우던 혁명군은 아침이 되면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초라한 패잔병이 스러져 있을 뿐이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나의 불타는 마음은 일반적인 갱년기 열감과는 달랐다. 친구는 자다가 몸이 달아오르고 갑자기 식었다가 등에서 땀이 흥건히 괸다고 했다. 같은 ‘열’이지만 벗의 경우는 몸이 데워졌고, 나는 마음속에서 기분이 고조되었다. 어떤 이는 육신의 열감이 어느 날 분노로 변했다고 한다.
가슴의 화기라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한국 중년 여성의 ‘화병(Hwa-byung)'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가부장제의 차별과 연결된 분노나 억울함을 오랫동안 억눌러서 생기는 병이라 근원부터 다르다.
나의 맘속 혁명군의 기세가 가장 막무가내며 포악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 에피소드를 듣고 보니 내 심지는 촛불에 불과한 거였다. 그들의 마음은 킹콩의 울분이나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끓어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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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의 그림 사진: 맥스 오펜하이머 <제니 발리에르의 초상> 1913년, 빈 레오폴트 미술관 특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