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모실 수밖에
혁명 세력 가운데 나를 가장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린 녀석은 불면증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며 둘째가라면 서러운 잠꿀꿀이를.
고등학교 때 수업 중 칠판을 쳐다보면서 눈을 감고 잠시 꿈나라를 다녀오다 선생님께 지적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기면증 수준이다. 고 3 여름방학 때는 낮잠 쿨쿨 자고 있는 나를 온 식구가 빙 둘러싸고 애가 대학을 어떻게 가나 하고 한숨지었다 한다.
결혼 생활 중에도 나의 하염없는 잠은 남편을 놀라게 했다.
“당신은 참….”
“뭐?”
“많이 자.”
“으응?”
“아니~ 그래서 그 힘으로 일 한다고.”
남편은 처음엔 많이 의아해하며 놀리다가 나중에는 내가 그리 아프지 않은 원동력으로 이해하고 포기했다.
내 사전에 불면증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불면증이나 수면장애 앓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무척 예민하거나 신경 쇠약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수면 유도제 먹는 사람들을 좀 한심하게 여겼다. 자신이 열심히 먹게 될 줄 모르고.
처음에는 생활 습관으로 이겨내 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커피를 확 줄이고 멜라토닌을 꾸준히 먹어 보았다. 비타민 디 수치가 낮아지지 않게 약도 먹고 주사도 맞았다. 미미한 도움만 있을 뿐이었다. 낮에 수영, 햇볕 아래 걷기 등등 온갖 운동을 실컷 해서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몸은 천근만근 힘들어 잠을 요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또릿했다. 이 상태가 오히려 더 힘들어서 극심한 운동은 안 하기로 했다.
밤에 서랍 정리, 밀린 옷장 정리, 이메일 보내기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을 마쳐도 정신은 또리방, 꼴딱 날을 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다음날은 푹 잔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다음 날 꿀잠보다는 겨우 몇 시간의 어설픈 잠이 찾아와 피로 해소에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그거라도 감지덕지였다.
잠 못 이루는 밤에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정리정돈, 가벼운 청소, 어렵지 않은 독서 정도였다. 너무 힘들어서, 시를 짓는다거나 어떤 창의적인 작품을 낳을만한 에너지는 생기지 않았다. 밤을 지새워 명작을 탄생시킨 예술가도 이런 불면증의 시간을 이용한 것 같지는 않다. 잠드는 일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어떤 영감에 이끌려 글을 쓰다 보니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밖에 깜깜함이 드리우면 포근한 안식에의 기대감이 생기던 때가 언제던가 싶었다. 밤을 맞는 것이 무서웠다. 패배가 빤한 게릴라전을 앞두고 있는 심정으로.
잠에 큰 문제가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푹 자는 사람들의 부요함이 느껴졌다. 호메로스의 시에서는 빛나는 눈의 아테나가 그들의 눈꺼풀 위로 달콤한 잠을 내려 준다.
잠 못 이루는 밤들은 원치 않는 선물도 안겨 주고 갔다. 바이러스 한 바구니, 늙는 소리 한 다발. 쉬이 아프고 피부가 날이 갈수록 거칠고 쭈글쭈글해졌다.
백기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불면증을 두목으로 삼아 일상으로 모셔왔다. 밤 시간의 보좌를 내주니, 그는 부담스럽다며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한다. 네~ 원하시는 대로 하십쇼.
밤이 되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의 소리> 사이먼 가펑클처럼 침대에서 떨떠름 손을 내밀었다.
“Hello darkness my friend~”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어느 정도 피로 해소가 된다니까, 잠을 청하느라 너무 실랑이하지 말아야지. 건설적인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자. 씩씩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의연함이 스러진다. 깨어있음과 얕은 수면(睡眠)의 경계에 닿을락 말락 함을 오간다. 얕은 파도가 모래사장을 적실 듯 말 듯하듯이. 수평의 친구 관계는 금 새 흐트러지고, 종이 상전을 우러르듯 잠을 간절히 바라다가 거의 구걸하는 심정이 되면 아침에 다다른다.
새날의 팡파르를 울리는 새벽의 여신 오로라와 정식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 훌륭한 옥좌에 장밋빛 손가락이라니, 그 싱그러운 존재는 내 아침의 너덜너덜한 양탄자와 어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밤새 이름 모를 노역(勞役)으로 그녀와 일별 할 기운조차 사라졌고.
눈부신 햇살과도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었다. 개운하게 자고 난 후 어린이처럼 힘차게 “안녕, 아침!”하고 외치던 때가 있었는데…. 뭐가 위축되어 눈을 마주치려는 해님을 슬슬 피하는 걸까? 잠의 여신 아테나에게 밤의 선물을 받지 못한 빈한함 일 것이다. 날마다 몸과 마음이 한껏 초라해진 행색으로 일을 하러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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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의 그림 사진: 장욱진 <나무와 새> 캔버스에 유화물감, 1957년, 덕수궁 현대미술관 회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