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동, 다시 따라온 그림자

관상의 법칙

by 세하

이사는 재개발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설명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호동을 떠난 건 분명 안도였지만,

어디론가 도망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조용한 공포 속에서 잠깐 숨을 돌리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동네, 새로운 골목, 새로운 담장들.

금호동의 흙먼지 대신,

풍납동은 조금 더 각지고, 말수가 적은 곳이었다.

골목길은 더 넓고 많아졌고,

사람들의 표정도 낯설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경계 속에서 자라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하얀 돌고래표 체육복을 입고 하교하던 겨울.

해는 느리게 기울고 있었고,

그늘진 골목마다 축축한 공기가 들러붙었다.


나는 익숙한 길을 걷고 있었다.

개미슈퍼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

엄마가 “이 길이 제일 안전해”라던 그 골목.


그때, 골목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본 그 얼굴엔

어딘가 낯익은 기색이 있었다.

처음엔 스쳐 본 얼굴인가 싶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억 속 그림자가 어둠처럼 따라붙었다.


그 얼굴.

내가 애써 잊으려 했던—

문방구 아저씨였다.


일곱 살.

풍납동 이모 집에 놀러 갔던 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흰색 팬티스타킹을 신은 채

문방구에 혼자 들어섰던 나.


그때

그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예쁘다.”

그리고

하얗고 커다란 손을 뻗었다.

처음엔 머리 위,

그다음엔 치마 밑으로.

날카로운 손끝이 스타킹 위를

천천히, 조용히 미끄러져

배 아래까지 내려왔다.

차갑고 축축한 느낌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바로

“엄마!”를 소리쳤고,

엄마가 들어오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변명했다.


“옷을 좀 똑바로 입혀 주려고요.”


그 얼굴.

얇고 길게 찢어진 입술,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게 가늘게 뜬 눈.

웃고 있는 건 분명했지만,

그 웃음엔 따뜻함이 없었다.

차갑고 미끈한—

뱀이 혀를 날름거릴 때처럼 느껴지는 미소.


지금,

그 얼굴이 다시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바짝 굳었다.

몸이 기억보다 빨리 반응했다.

걸음을 늦추지도, 빨리지도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는 대각선으로 걸었고,

나는 점점 벽 쪽으로 붙었다.

그리고

그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그의 손이—

다시, 내 몸의 가장 깊은 곳을 스쳐갔다.


정확히,

집요하게.


나는 멈춰 서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숨이 끊긴 듯 헐떡거렸고,

얼굴은 화끈거렸고,

다리는 벌벌 떨렸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골목 끝 시장통을 향해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얼굴을 기억해 냈다는 것도,

그 손의 감촉도—

다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하는 순간,

그 일이 더 선명해질까 봐.

다시 그 손이 따라올까 봐.

그리고

무엇보다,

또 낯선 곳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다 자란 척하고 싶었다.

아무 일도 아닌 척하고 싶었다.

그게…

어릴 적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티기’였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시간은 흐를 뿐,

그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일곱 살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되어

그 진실을 받아들였다.


keyword
이전 02화사라질 뻔한 나, 그리고 남겨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