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예감
방학이면 어김없이 외갓집으로 놀러 갔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이었다.
외갓집에서 놀다가, 어린 동생만 남겨둔 채
나는 외갓집에서 차로 오 분 정도 거리의 외삼촌 댁으로 갔다.
여느 때처럼 또래 언니, 오빠들과 장난을 치며 놀았다.
창밖에는 하얀 입김이 퍼졌고, 손끝은 금세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웃음소리는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급했다.
“아빠가 일 때문에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야 한대.
너도 같이 갈래? 아니면 좀 더 놀고 있을래?
더 있고 싶으면 이틀 뒤에 데리러 올게.”
망설였다.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옆을 슬쩍 바라봤다.
언니가 두 손을 모아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놀자!”
결국, 나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좀 더 놀래요.”
전화를 끊자, 다시 왁자지껄한 놀이는 이어졌다.
하지만 즐거운 그 와중에
내 입에서는 이상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 내일 같이 안 가면 고아가 될 것 같아.”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모두 웃었지만,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싸늘한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오빠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침에 아빠한테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 달라해.”
나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늦은 새벽. 아니 아침이 다되어서야
삼촌은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술과 찬 겨울바람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잠든 척, 아무 일도 모르는 척.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진짜 무슨 일이 생기겠어…’
창문 밖 흩어지는 하얀 입김 너머로,
겨울 새벽빛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하늘 아래,
먼동이 트기 직전의 희뿌연 빛이 세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빌면서.
⸻
늦은 아침.
나는 혼자 늦게 일어났다.
모두 아침을 먹고 난 뒤였다.
나는 조용히 식탁에 앉아 늦은 아점을 먹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외숙모가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숨죽이며 상대방의 말을 듣더니,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네 집으로 가자.”
나는 환하게 웃었다.
“와! 아직 출발 안 했구나! 다행이다! 같이 갈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외숙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세영이가 할머니 집에 있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물었지만 외숙모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외갓집으로 향했다.
길은 낯설게 멀었다.
손을 꼭 쥔 외숙모의 손에서,
차가운 불안감이 전해졌다.
길을 걷는 동안,
외숙모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른 걸음에 맞춰 뛰다시피 하며 따라갔다.
겨울바람이 텅 빈 논둑을 쓸고 지나갔다.
황량한 들판 위로, 마른 갈대들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도,
찬 바람에 부딪혀 흐릿하게 퍼졌다.
외갓집에 다다랐을 때,
처마 밑에는 바람 한 점 없이,
얼어붙은 적막만 내려앉아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동생이 마치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텅 빈 눈,
바짝 말라붙은 입술,
움직이지 않는 작은 손.
그 옆에서 할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는 소리.
나는 달려갔다.
동생의 양 어깨를 흔들며 외쳤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지만 동생은 고개만 저을 뿐,
입을 꾹 다문 채 울지도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주름진 손을 무겁게 뻗어 나를 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가… 서울 가다가… 사고가 났단다.”
그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비현실적인 듯,
그러나 단박에 가슴을 조여 오는 말.
그 말이 머릿속에 박히는 순간,
세상이 무너졌다.
출발한 지 겨우 15분.
신호에 정차했다가 출발하는 순간,
비탈진 도로 위에 멈춰 있던 화물트럭이
뒤따르던 아빠 차를 덮쳤다고 했다.
아파트 기둥을 짓는 콘크리트 자재,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파편들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뉴스에는
‘일가족 사망’이라는 오보까지 흘러나왔다.
⸻
나는 울지 않으려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웠다.
하지만 몸속 어딘가에서 끓어오른 뜨거운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그런 말을 해버려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갈라지는 듯 아팠다.
좋은 집,
따뜻한 엄마,
든든한 아빠,
동생과 함께 마당 은행나무에 걸어만든 그네를 타며 웃던 풍경——
그 모든 것들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고요.
그리고
나.
말이 씨가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말은 내 안에 뿌리를 내려,
천천히, 조용히 나를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