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병원 생활은 길어졌다.
아빠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고,
엄마는 1년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제대로 퇴원할 수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회복 중이었고,
우리 가족은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태였다.
엄마의 퇴원은
기쁜 소식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더 작고, 더 낡은 집으로의 이사를 뜻했다.
사고 이후,
가해자 측은 사정이 어렵다며
엄마에게 호소했다.
산재보험도 없이 사고를 낸 운전자.
“그 사람, 참 딱한 상황이더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말끝은 흐릿했다.
안도인지 후회인지 모를 눈빛으로
코트깃을 만지작거렸다.
그 선택은
곧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되었다.
좁아진 집과 무거워진 공기.
그리고—
더 커진 책임.
⸻
오빠는 대학생이었고,
알바를 하며 아빠 병원을 오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주말이면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날—
평범했던 병실의 풍경이
단숨에 뒤틀렸다.
그날은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응원 소리가 들려오던 날이었다.
월드컵이었는지, 올림픽이었는지—
기억은 흐릿하다.
환자들은
작은 TV 앞에 모여
대한민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오빠는 그들 틈에 섞여 자리를 잡았고,
가볍게 웃으며 옆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잠시나마 ‘정상적인 청춘’처럼 보였다.
나는
아빠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
그때—
무언가가
내 머리 옆을 스쳤다.
휙!
TV 앞 바닥에 떨어진 건 찢어진 우유팩이었다.
바닥에는 하얀 액체가 흩어졌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날아왔다.
과일을 깎던
과도 칼이었다.
칼집에 들어 있던 칼은
바닥에 부딪히며 무겁게 구르고, 튀었다.
정적.
병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오빠를 향해
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게
그렇게 좋냐?”
“죽겠다는 사람 앞에 두고,
뭣들 하는 짓거리야.”
그 목소리는
괴물 같지도,
분노 같지도 않았다.
그저,
부서진 사람의 마지막 외침 같았다.
⸻
나는 아빠를 말렸다.
오빠도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고요가 조금 돌아왔을 무렵,
아빠는 눈을 감고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오빠가 아빠 가까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미쳐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할 거면...
그때 그냥 죽지 그랬어요.”
나는,
그 말이 아빠의 귀에 닿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자식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말했다.
모두, 빠짐없이.
엄마는
작은 방 안에서
내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빠랑 언니는
네 친형제가 아니야.”
⸻
말문이 막혔다.
“처음 소개받았을 땐 몰랐어.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
아빠가, 아이 둘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바람난 아빠의 전처는
아빠가 사우디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 둘만 남긴 채,
전 재산을 들고 도망쳤다고 했다.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손에 아이들을 맡겼다는데
엄마는 그런 아빠가, 너무 가여워 보였어.”
난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고,
내 눈빛은 엄마를 동정하고 있었다.
“아빠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 같았거든.
다정했고, 참 착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시골 마당 한쪽에 조촐한 상을 차려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엄마는 그저,
‘사람’을 보고 결심했던 거야.”
⸻
나는,
오빠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엄마는 매일 아침,
이른 등굣길에 나서는 오빠 때문에
두 번의 상차림을 해야만 했다.
오빠는
아침부터 침도 안 나오는 입으로
마른 구운 김을 억지로 씹어 넘겼고,
엄마는 천천히 먹으라며 잔소리를 했었다.
‘남의 자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굳이 꼭 그런 선택을 해야 했어?
언니랑 오빠가 몇 살이었는데?”
“언니는 7살,
오빠는 5살.
처음 봤을 때,
정말 거지꼴이 따로 없었어.”
“그 아이들이 버려진 게,
너무 마음에 걸렸거든.
그래서…
내 아이처럼 키우기로 다짐했지.”
⸻
나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말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자연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이 어떤 조각들로 이루어진 집 같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언니 오빠를 향한 아빠의 엄격함과 뜻 모를 엄마의 눈치.
내가 새로운 학원을 다닐 때마다 얼마짜리 학원이냐고 묻는 오빠의 거리감,
그리고 언니의 조숙함까지.
그건,
하나의 가족이라는 틀에
간신히 맞춰진 퍼즐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병실에서,
오빠가 아빠를 향해 던졌던 잔인한 말들.
왜 그렇게 미워했는지.
왜 그렇게 멀리 있었는지.
그런데도 나는, 마음 한편이 아팠다.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럴 수 없었던 걸까.
역시,
다른 피가 흐르는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너무 일찍 상처받아버린 탓이었을까.
⸻
나는 그 밤,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단어가
조금 아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