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흔들리는 풍경

분열의 서막

by 세하

아빠는,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두 발로 선 건 아니었다.

아직은,

까마득히 먼 이야기였다.


아빠는,

침대에 몸을 기대어

한 손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렸고,

간호사의 부축 없이도

비틀거리며,

아주 천천히,

절뚝이는 걸음을 시작했다.


그건,

누가 봐도 위태롭고 불안한,

언제 쓰러질지 모를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 흔들리는 발끝에는

살아야겠다는,

어떻게든 버텨야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숨 쉬고 있었다.


희망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우리 아빠가… 다시 걸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 믿음 하나로 버텼다.

깨져 가는 마음을,

하루하루 이어 붙이며.


하지만,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아빠의 마음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아빠는 달라졌다.

아니,

변해버린 것은

몸뚱어리만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사람 자체가,

아빠라는 이름이

가진 모든 것이,

처절하게 무너져있었다.


감정의 기복은,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험한 말이 튀어나왔고,

버럭 소리쳤다가,

아무 말도 없이 침묵했다가,

한참을 울 듯이 붉어진 눈으로

욕설을 뱉어냈다.


나는 애써 생각하려 했다.

‘수술로 인한 신경 손상 때문이겠지.’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매일 새로 생겨나는 상처를 막아주진 못했다.



그리고, 퇴원.


우리는,

휠체어 없이,

비틀거리는 아빠를 부축해,

오래전 보다 훨씬 좁아진 공간으로 돌아왔다.


삶은,

더 작아졌고,

숨은,

더 조심스러워졌고,

기대는,

더 얇아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멈춰 있던 싸움이,

서서히,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그들은 가끔 다퉜다.


나는,

유치원생이었다.


작은 교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바지에 실수한 채로 울고 있었고,

엄마는,

갈아입힐 옷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날,

선생님은 내 그림일기를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 앞에서는…

안 싸우시면 안 될까요?”


그날 이후,

정말 오랫동안,

세상은 조용했다.


엄마와 아빠는,

마주 앉으면 자연스레 웃었고,

사소한 말에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안에는,

작은 숨소리까지 따뜻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시간이 흘렀다.


서로를 향해

더 자주 웃었고,

더 자주 장난을 걸었고,

웃음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자주,

온 집 안을 가득 메우곤 했다.


그 조용함은,

억지로 참고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기에 만들어진,

단단하고 다정한 평화였다.


두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세상 누구보다,

진심으로 서로를 아꼈다.


아마,

그 조심스러운 행복도,

조용히 지켜낸 평화도,

결국은—

어린 나를 위한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 평화는,

아빠의 퇴원과 함께

처참히 무너졌다.



아빠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슈퍼에 가는 짧은 시간조차

견디지 못했다.


“당신…

그 슈퍼 아저씨랑,

뭐 있는 거 아니야?”


아무 이유도 없는 의심.

근거도, 맥락도 없이 터지는 고함.


움직이지 못하는 몸,

혼자 남겨지는 외로움,

어디에도 쓸 수 없는 초라한 분노가,

아빠를 삼켜버린 듯했다.


한때,

우리를 지켜주던 사람이었는데.

한때,

우리가 기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돌봐야 하는 존재로 변해버린,

그 비참한 현실을,

아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상실감은,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비뚤어진 의심과 분노로

형체를 바꾸어 폭발했다.


엄마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끝내 참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나…

그 슈퍼 아저씨랑

눈도 제대로 안 마주쳐.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엄마는 아빠에게 평생 듣지 못했던,

이상한 말들을 들을 때마다

혼자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어..”


엄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너머에는

바닥까지 말라버린 메마른 절망이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숨을 쉴 때조차 조심스러웠고,

작은 소음 하나에도

누군가 폭발할까 두려웠다.


동생은,

내 곁에도 잘 오지 않았다.


그 아이도,

자기만의 어둡고 좁은 방어막 속에서

공포를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동생은 매일,

숨을 죽였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진 않을까,

엄마가 울진 않을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릴까.

끝없이, 끝없이,

긴장했다.


퇴원은,

결국 끝이 아니었다.


병원보다 더 쓰리고 긴 전쟁이,

그제야 시작된 것이었다.



오빠는,

좁아진 공간을 벗어나,

결혼한 언니네로 옮겨갔다.


어린 나이에 아이 둘을 낳고 지쳐버린 언니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고,

오빠 역시

집을 나간 이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15살,

사춘기의 문턱에서 나는,

점점 쪼그라드는 벽 안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언젠가는

숨이 막혀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매일같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어디도,

내가 갈 곳은 없었다.


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천천히 갇혀갔다.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나는 말라갔고,

굳어갔고,

조용히,

산산이 부서져갔다.


그건 내가 바란 가족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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